“와인업계에 품질 좋은 포도가 수확되는 빈티지 연도가 있듯이, 역사에도 빈티지 연도가 있는데 2007년이 그런 해다.” 얼마 전 인공지능(AI)과 인간의 번역 대결 때 출제된 지문이다. 뉴욕타임스 간판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의 신작 《늦어서 고마워(Thank You for Being Late)》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의 얘기대로 아이폰과 트위터, 킨들, 안드로이드 등 획기적인 발명이 2007년 전후에 등장했다. IBM의 인공지능 컴퓨터 왓슨과 전 세계를 하나로 잇는 클라우드 서비스도 그 무렵에 나왔다. 이젠 자율주행 자동차와 드론마저 낯설지 않다. 공상과학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일들이 우리 곁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폭발적인 속도로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21세기를 프리드먼은 ‘가속의 시대(age of acceleration)’라고 부른다.
'가속 시대' '급류사회' 생존법
지난 5월 방한한 그는 세상을 뒤바꾸는 또 다른 힘으로 ‘세계화의 가속화’를 들면서 “개인이나 기업이 세계를 무대로 경쟁하고, 연결하고, 거래하고, 협력하는 능력이 더 커질 것”이라고 했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세계는 평평하다》 등으로 세계화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그는 “이젠 전 세계가 연결(connected)에서 상호연결(interconnected)·초연결(hyper-connected)·상호의존(interdependent) 상태로 이동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세계가 동시에 평평하고(flat) 빠르게(fast) 됐기 때문에 아주 작은 실수도 엄청난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시속 5㎞로 500㎞를 가면 되는 시대에는 나쁜 지도자를 만나도 쉽게 궤도를 수정할 수 있었지만, 시속 500㎞로 5만㎞를 가야 하는 시대에는 본궤도로 복귀하는 데 엄청난 고통이 따른다.”
그만큼 지도자의 리더십이 더 중요해졌다는 얘기다. 요즘 우리 정치권을 보면 ‘가속의 시대’가 아니라 ‘초(超)가속의 시대’ 같다. 새 정부가 출범한 지 석 달도 안 됐는데 너무 조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비정규직 문제부터 최저임금과 통상임금, 근로시간 단축, 원전 중단, 세금 인상까지 하나같이 속도전이다. 거의 모든 것을 선악 대결로 규정하고 편 갈라 싸우는 모습은 마주 보고 급발진하는 자동차 같다.
정치·사회 조급증 벗어나야
국정과제 우선순위도 앞뒤가 바뀌었다. 경제 살리기보다 ‘적폐 청산’이라는 이름의 벌 주기를 앞세우니 ‘보복 오해’를 살 만하다. “무엇을 파괴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건설할 수 있느냐로 국가를 규정해야 한다”(오바마)는 말은 먼 나라 얘기다. 사회 구성원들도 “나부터 빨리 챙겨달라”며 곳곳에서 생떼를 쓴다. 모든 게 급하게 소용돌이치는 ‘급류사회’라고나 할까.
급류에 휩쓸리지 않는 방법은 무엇인가. 프리드먼은 ‘역동적 안정성(dynamic stability)’을 확보하라고 권한다. 급류에서 계속 노를 저으며 물결을 타는 것처럼 ‘태풍의 눈’으로 들어가 그 속에서 안정성을 유지하라는 얘기다. 냉전 시대에 탄생한 좌·우파 사고방식을 버리고 경제 각 부문의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을 찾는 것도 급선무다. 정부와 민간의 파트너십을 키우는 법 또한 배워야 한다.
그러려면 잠시 멈춰 생각해야 한다. 미국 시인 랠프 월도 에머슨은 ‘멈출 때마다 나는 듣네’라고 노래했다. 지금 우리에겐 어느 때보다 깊은 통찰이 필요하다. 급할수록 보폭을 조절해야 한다. 속도보다 더 중요한 건 방향이다. 프리드먼의 《늦어서 고마워》도 약속 시간에 늦은 동료 덕분에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가졌던 경험에서 얻은 것이라고 한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