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50년사에 아르헨티나 한인의 ‘동포애’ 담았죠”

입력 2017-08-04 14:10   수정 2017-08-04 14:13

'아르헨티나 한인 이민 50년사' 펴낸 장영철 편찬위원장

동포 사랑 속에 싹튼 섬유업…지금도 교민 70% 이상 종사



1965년 10월14일 한국인 13가구 78명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항에 내렸다. 아르헨티나 한인 이주의 역사가 시작된 날이었다.

한국을 찾은 장영철 아르헨티나 한인 이민 50년사 편찬위원장은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초기 이민자들은 물질적으론 가진 게 거의 없었지만 ‘동포애’라는 값진 무형의 자산을 갖고 있었다”며 “섬유 관련 업종에 종사하다 온 몇몇 분들이 ‘같이 먹고 살자’며 이웃 동포들에게 편물(뜨개질)을 가르쳐 준 덕분에 지금은 한인 동포들이 아르헨티나 의류 산업을 꽉 잡고 있다”고 말했다.

1992년 아르헨티나로 이민 가 현지에서 기자 생활을 했던 그는 올해 초 640쪽 양장본으로 된 ?아르헨티나 한인 이민 50년사?를 펴냈다. 아르헨티나 한인회와 함께 원래 이민 50주년이 되는 해인 2015년에 책을 낼 계획이었지만 초기 이민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컬러 인쇄에 맞게 편집을 바꾸면서 발간이 늦어졌다.

“초기 이민자들은 당시 한국에서 중산층이었습니다. 많은 분이 지금은 작고했는데, 살아계실 때 제가 왜 아르헨티나에 이민을 갔냐고 물어보니 ‘정신적 배고픔’때문이었다고 해요. 전후 복구가 다 안 이뤄져 여러 가지로 혼란스럽고 피폐한 때였죠.”

초기 이민자들은 아르헨티나 라마르께 지역에 400헥타르 땅을 무상 임대받았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농사를 지은 경험이 없고, 변변한 농기구조차 없었던 그들은 고군분투하다 결국 농업을 포기하고 도시 노동자로 흘러들었다. 장 위원장은 “당시 외환 규제법에 따라 이민자들은 한국에 돈이 있어도 최대 400~500달러밖에 가져오지 못했다”고 했다.

“초기 이민자 중에 지금은 호주에 사는 조화숙이란 분이 있어요. 자기가 편물을 짜는 능력이 있으니, 이를 한인 여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여성들이 집에서 편물을 짜며 벌어들인 돈이 하루에 1달러50센트 정도였는데, 과거 농장 생활할 때 10시간 일하고 1달러 벌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많은 수입이었죠.” 초기 이민자 최영덕 씨는 남자들에게 편직을 알려주면서 섬유업은 아르헨티나 한인의 주업종으로 자리 잡았다.

정 위원장은 “지금도 아르헨티나 교포 3만여 명 가운데 70% 이상이 의류 관련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고 했다. 단추나 지퍼, 봉제는 물론이고 한인이 경영하는 유명 의류 브랜드 업체도 탄생했다. “아르헨티나를 넘어 중남미에서도 대단히 인기가 많은 브랜드예요. 수영복에선 ‘노다지’나 ‘솔레아노’, 청바지는 ‘나하나’, 여성복은 ‘까라멜로’ 같은 브랜드가 있습니다. 중남미 사람들이 남에게 자랑하려고 사 입는 브랜드예요.”

아르헨티나에서의 삶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1993년 3~4월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한인과 아르헨티나인 간 갈등이 고조된 ‘4월 사태’가 일어났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한국보다 잘 산다는 우월감이 있었어요. 그런데 한국이 1988년 서울올림픽을 치르고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한인을 경쟁 상대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아르헨티나 경제가 어려워지고, 중남미 인접국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유입되며 불만이 커진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한인을 타깃으로 삼았다. 아르헨티나 언론은 연일 한인 공장의 불법 노동자 고용을 문제 삼았다. 정부는 노동부와 국세청을 동원해 한인 업체를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한때 4만여 명이 넘었던 아르헨티나 한인은 이 일을 계기로 미국이나 캐나다로 빠져나가 지금은 3만 명을 조금 넘는 수준이라고 한다. 정 위원장은 “이후 한인들도 ‘우리가 우리 동포와 우리 문화만을 중시한 것 아닌가’하는 반성을 했다”며 “지금은 다시 한인을 ‘근면 성실한 사람’, ‘청자의 신비를 닮은 민족’이라고 하는 등 현지 분위기가 긍정적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장 위원장은 미국 출장 때 시간이 남아 아르헨티나에 들렀다가 이민을 결심하게 됐다고 한다. 한인 타운에서 만난 한인 3명을 따라 400㎞ 떨어진 곳에 낚시를 갔는데 아름다운 밤하늘과 자연환경을 보고 반했다는 것이다. 그는 “한인 동포들도 인심이 후해 여행자일 뿐인 제게 다들 자기 집에 와서 밥 먹자고 했다”며 “한국에 돌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르헨티나에 이민을 왔다”고 말했다.

1950년생으로 칠순을 바라보는 그는 “이민 50년사를 통해 후세대에 ‘동포애’의 중요성을 말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낯선 땅에서 한인들이 역경을 딛고 성공을 이룰 수 있었던 힘은 이웃을 사랑하는 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르헨티나 한인 사회의 자랑거리이고, 후세대의 정신적 자산으로 계속 남아있기를 바랍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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