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짱토론] 장기연체자 빚 탕감 해줘야 하나

입력 2017-08-04 18:03   수정 2017-08-05 07:22

[ 이태명 기자 ] 문재인 정부가 서민·취약계층을 위한 금융지원 정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이달 말까지 공공부문의 소멸시효 완성 채권 21조7000억원어치(123만1000명)를 소각하는 데 이어 민간부문 연체채권 4조원(91만2000명)도 자발적 소각을 유도한다는 계획이다. 이달 말께 대규모 빚 탕감 정책도 내놓는다. 국민행복기금과 금융공공기관, 대부업체의 소액·장기 연체채권을 없애준다는 방침이다. ‘빚 추심’ 공포에 시달리는 연체자의 부담을 덜어줘 재기를 돕겠다는 게 정책 취지다.

빚 탕감 대상자가 얼마나 될지는 아직 미정이다. 일각에서는 수십만 명에 달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내건 국민행복기금 소액·장기 연체자(1000만원 이하, 10년 이상 연체)만 40만3000명이다. 자산관리공사 예금보험공사 등 금융공공기관이 보유 중인 장기 연체채권도 21조7000여억원, 채무자 수는 28만1400여 명이다. 대부업체에 빚을 진 장기 연체자는 파악조차 안 된다. 어림잡아도 수십만 명에 달할 것이라는 게 금융권의 전망이다. 금융당국은 갚을 능력이 있는지를 엄밀하게 따져본 뒤 정말 상환 여력이 없는 채무자만 대상으로 선정하겠다는 방침이다.

빚 탕감 정책을 둘러싼 논란은 찬반 양론이 팽팽히 맞선다. 빚 탕감 정책이 필요하다는 쪽에서는 “소액 장기 연체자는 사실상 빚 갚을 능력이 없는 계층”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이 채권 추심 공포에서 벗어나 새 출발하게 도와주는 게 국가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다. 하지만 빚 탕감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탕감 대상자에 포함되지 않는 채무자의 불만이 터져나올 수밖에 없고, 중장기적으로 ‘빚은 안 갚아도 된다’는 인식만 심어줄 것이라는 주장이다.

찬성 장기연체자 대부분 변제능력 없어…빚 부담 없애 재기 돕는 게 낫다
금융사들 무차별 대출 관행 개선시킬 것

정부는 25조7000억원에 달하는 소멸시효 완성 채권을 소각하기로 했다. 214만3000여 명이 혜택을 본다고 한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언급한 “상환 능력이 없는데도 장기간 추심 고통에 시달린 취약 계층의 재기를 돕겠다”는 취지에 적극 공감한다.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 등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지만 이는 기우다.

장기 연체자의 채무 탕감은 인권을 지키는 일이다. 이들은 단지 빚을 갚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로 비인간적 추심에 노출돼 극심한 고통을 받는다. 심지어는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죽음으로 내몰리기까지 하는 비정한 현실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이들의 압도적 다수는 자산과 정보가 부족한 경제적 약자로서 불운한 희생자일 따름이다. 어느 누구도 경제적 궁핍과 불운 때문에 인권을 유린당하고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겨서는 안 된다.

채무에 짓눌린 사람을 그 부담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은 경제적으로 효율적이다. 강도 높은 채권 추심에 노출되면 정상적인 경제활동이 어려워진다. 설사 경제활동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노력의 대가를 궁핍한 본인의 상황을 개선하는 데 사용하기보다 채무 상환에 쓴다면 어려움을 이기고 열심히 노력할 유인이 사라지고 미래를 위한 투자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이런 ‘채무 후유증’이 초래하는 인적 자원 낭비를 방치하는 것보다 채무 탕감으로 채무자의 재기를 돕는 것이 더 경제적이다.

물론 채무 탕감이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를 조장할 우려가 존재한다. ‘버티면 탕감되겠지’라는 생각이 만연함으로써 채무 불이행을 조장하고, 이 때문에 금융거래가 위축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이런 문제가 실제로 나타날지는 탕감 대상이 어떻게 정해지는지에 달려 있다. 채무 변제 능력이 있으면서도 갚지 않고 버틴 사람의 채무는 당연히 탕감 대상에서 제외돼야 한다. 그런데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는 것은 이미 변제 능력이 없다는 것이 상당한 정도로 검증됐음을 의미한다. 또 정부가 재산 조사까지 한다고 하니 도덕적 해이 문제는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소액 장기 연체자의 압도적 다수는 일부러 빚을 갚지 않고 버틴 것이 아니라 형편이 어려워 빚을 갚지 못한 것뿐이며 대부분 이를 매우 부끄럽고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많은 경우에는 원금 이상의 금액을 이미 변제했으나 불어나는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장기 연체자가 되기도 한다.


채무자에게 변제 의무가 있다면 채권자에게는 신중한 대출의 의무가 있다. 채무자가 갚을 능력과 의지가 있는지 잘 판단해 돈을 빌려줘야 한다. 이런 신용평가 능력은 금융의 효율성과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핵심적인 역량이다. 채무 탕감이나 최고금리 인하, 과도한 추심 제한 등 채무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금융회사의 신중한 대출을 유도하고 신용평가 능력을 제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채무자 권리 보호 강화가 자칫하면 제도권 금융회사의 서민 금융시장 회피를 조장해 서민이 대부업이나 불법 사금융 시장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두 가지 대책이 필요하다. 급전이 필요한 서민에게는 중금리 대출이 제공되도록 정책적으로 뒷받침해야 하며, 만성적으로 생활비가 부족한 경우에는 금융이 아니라 고용과 복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복지서비스를 확충해야 한다. 서민이 당장 생계가 어려워 갚을 수도 없는 빚을 냈다가 끝 모를 고통의 나락에 빠지는 일은 애초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반대 부채 경감 아닌 '100% 탕감' 처음 "나도 버텨볼까" 도덕적 해이 불러
열심히 빚 갚는 채무자와 형평성 논란

돈벼락을 맞으면 그만큼 세금을 내야 하지만 빚을 탕감받으면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 가장 큰 횡재는 빚 탕감이다. 빚 탕감은 중독성이 강한 ‘사회적 마약’일 수 있다. 그래서 신중해야 한다.

정책당국이 큰 결단을 내렸다. 금융공공기관과 민간 금융회사가 보유한 소멸시효 완성 채권 25조7000억원을 연말까지 소각하기로 했다. 내용을 보면 국민행복기금 5조6000억원, 금융공공기관 16조1000억원, 민간 금융회사 4조원으로 총 214만3000명이 1인당 1199만원씩 부채 탕감 혜택을 본다. 채무자의 빚 기록이 금융 전산시스템에서 삭제돼 장기 연체와 추심의 족쇄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금융거래도 재개할 수 있다.

정책당국의 논리는 간명하다. 회수율이 지극히 낮은 소멸시효 완성 채권을 왜 굳이 들고 있느냐는 것이다. 금융 약자를 포용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것이다. 빚 탕감의 명분은 늘 그럴듯하다. 하지만 짚어봐야 할 게 있다. 과거에도 ‘빚을 줄여준다’는 공약과 정책은 있었지만 ‘최소한의 선’은 지켰다. 빚을 100% 탕감한 적은 없었고 빚을 줄이더라도 ‘친(親)시장적’으로 접근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7년 대선 때 농가부채 탕감이 아니라 ‘경감’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집권 후에는 상환 연장과 이자 감면에 그쳤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7년 대선에서 ‘720만 신용 대사면’을 공약했지만 실제 정책에선 한걸음 물러나 3000만원 이하 연체자 72만 명의 이자 감면을 대상으로 삼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민행복기금’을 세워 기초생활수급자의 경우 부채를 최대 90% 탕감했다. 하지만 100% 탕감이 아니기에 최장 10년 동안 분할상환해야만 빚에서 벗어날 수 있다. 국민행복기금은 채권자인 은행 등이 주주로 참여해 설립한 상법상 주식회사다.

완전 빚 탕감에서 우선 고려사항은 ‘형평성’이다. “사전에 약정에 따라 열심히 빚을 갚은 사람은 뭐냐”는 원초적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행복기금은 1000만원 이하, 10년 이상 장기 연체자지만 약정을 맺고 감면받은 빚을 갚은 채무자가 이미 83만 명에 이른다. 100% 부채 탕감 정책은 어떤 수식어를 갖다 붙이더라도 형평성의 원칙을 위배한 것이다.


정부가 부실채권을 사들여 소각하려면 국민 세금이 들어가야 한다. 따라서 세금 투입이 정당화되도록 부채 탕감 대상을 정밀하게 설정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대부업체’를 포함시킨 것은 긍정적이다. 서민이 가장 고통받는 악성 빚이 대부업체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대부업체의 장기 연체채권 현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채권채무 현황을 파악하지 않은 채 빚부터 탕감해주겠다는 것은 졸속정책이 아닐 수 없다.

반면 민간은행까지 대상을 넓힌 것은 중대한 실책이다. 올해 말까지 4조원을 소각할 예정이다. 그동안 민간 금융회사들은 시효 연장, 포기, 소각 등 연체채권 관리 등을 자체적으로 판단해 시행해왔다. 차제에 민간 금융회사들이 협의해 ‘가이드라인’을 정해 자율 처리하도록 기회를 줄 필요가 있다. 4조원 소각은 이번 조치에서 제외돼야 한다. 그리고 부채 탕감 상한선을 둘 필요가 있다. 현재 1인당 탕감 규모가 1199만원이다. 예컨대 500만원이 넘는 채무 탕감은 약자 보호와 무관하다. ‘금융 약자를 포용할 것인가, 아니면 도덕적 해이를 막을 것인가’ 선택에서 금융시스템의 강건성을 위해선 후자를 선택해야 한다. 정부 주도의 부채 탕감은 이번이 마지막이어야 한다.

이태명 기자 chihir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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