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이 '왼쪽'보다 풍요로운 성과 가져와
탈정치의 자생적 경제 생태계 기반 다져야
정갑영 < 연세대 명예특임교수, 전 총장 >
최근에도 널리 회자하는 ‘좌파’와 ‘우파’라는 표현은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유래됐다. 1789년 루이 16세는 175년 만에 삼부회의를 소집하고 귀족의 면세특권을 박탈해 재정 파탄을 모면하려 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봉건 군주에 저항하는 시민대표와 귀족, 성직자 간 대립으로 세 신분을 대표하는 삼부회의는 와해됐고 이것이 곧 프랑스 대혁명의 서막이 됐다. 당시 회의장에서 왼쪽에는 혁명의 주도파가 앉고 오른쪽에는 왕권의 지지파가 자리했던 연유로 오늘날까지 좌파는 진보, 우파는 보수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그동안 왼쪽과 오른쪽의 대립은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양상으로 폭발하기도 했고 수많은 다툼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여러 형태로 진화됐지만 아직도 갈등의 유산은 곳곳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경제에서 왼쪽은 공동생산과 분배, 평등을 추구하고 다른 쪽은 정부 개입보다는 시장과 개인의 사적 동기를 바탕으로 한 자원배분의 효율성을 지향해왔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붕괴와 더불어 이념논쟁도 후쿠야마의 저작처럼 ‘역사의 종언’이 됐고 지금은 양쪽의 경계조차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 보수는 왼쪽으로 클릭하고 진보가 오른쪽으로 다가서면서 ‘개혁 보수’와 ‘중도 진보’ 등 정치권의 표현도 다양해졌다.
실제로 경제정책에서는 왼쪽이 정부 개입과 분배를 중시하고 오른쪽이 시장과 효율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세계무대에서 온 나라가 경쟁하는 현실에서 이런 논쟁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좌우 불문하고 어디에 앉든 국민 모두를 부유하게 하는 정책이 가장 절실하다. 그 해답을 역사적 경험에서 찾는다면 오른쪽이 왼쪽보다 더 풍요로운 성과를 가져온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중국마저도 시장이라는 오른손으로 식량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오른쪽이 항상 완벽한 것은 아니기에 선진국들도 대부분 시장 생태계를 지속적으로 보완하면서 풍요의 꿈을 실현시켜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아직도 정치이념이나 인기에 편승해 왼쪽을 기웃거리는 경우가 많다. 특히 분배나 경쟁여건의 악화로 사회적 불만이 누적되고 경기침체로 일자리마저 줄어들면 그런 유혹에서 더욱 벗어나기 힘들다. 최근 우리가 처한 상황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단기적으로 정부 주도의 일자리 창출과 최저임금의 대폭 인상, 부자 증세 등은 상당한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시장의 생태계를 훼손해 오히려 정책 의도와는 상반된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된다. 이미 고용을 축소하고 이 땅을 떠나겠다는 기업이 등장하고 있지 않은가.
정부 주도의 성장과 분배를 추구한 해외의 사례도 타산지석이 된다. 1980년대 일본은 과다한 정부지출로 천문학적인 부채만 안고 ‘잃어버린 20년’을 보냈고, 남미 분배정책의 실패도 널리 인용된다. 반면 레이건은 세율을 낮추고 정부지출을 축소하면서 생산성 향상을 통해 경제를 살린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가 또 하나의 성공모델을 만들기 위해서는 경제정책이 정치이념으로부터 탈피해 경제주체가 자생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소득과 고용이 지속적으로 창출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민간의 자발적인 투자와 생산성 향상이 뒷받침돼야 한다. 규제 혁신을 통해 경제주체의 마음을 움직이는 동인(動因)을 부여하고 산업의 대외경쟁력에 대한 큰 비전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왼쪽의 꿈인 후생과 분배의 개선도 경제 활성화를 통한 양질의 일자리와 교육 기회의 확대가 있어야만 실현될 수 있다.
경제는 결코 법이나 명령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모든 경제주체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기 때문이다. 설령 왼손으로 국내 기업을 다스린다 해도 대외여건은 오른손의 힘으로 작동한다. 위기를 타파하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은 필요하지만 오른손의 움직임을 지나치게 제약하면 왼손이 추구하는 가치마저 실현되기 어려워진다. 모두 기본으로 돌아가, 왜 오른쪽이 왼쪽보다 부유한가를 살펴보자.
정갑영 < 연세대 명예특임교수, 전 총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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