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엽의 데스크 시각] '비정치적인 것'에 대한 예의

입력 2017-08-07 18:30  

백광엽 지식사회부장 kecorep@hankyung.com


문재인 정부 출범 100일이 코앞이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하다. 경제 외교 안보 노사 교육 어느 것 하나 위태위태하지 않은 게 없다.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이단적이기까지 한 모험적인 정책이 줄을 잇고 있다. 팩트와 통계마저 왜곡하는 정부의 여론몰이도 새 풍속도다. ‘이건 나라인가’라는 의구심이 만만찮다.

'적과 동지'의 살벌한 구분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과 참모들의 생각은 딴판이다. ‘모든 해법을 내가 알고 있다’는 듯 자신만만하다. 수십년 묵은 난제도 하루아침에 일도양단이다. 청와대를 비추는 TV 화면에선 항상 웃음이 차고 넘친다. 그래서 더 불안하다. 초조함을 숨기려는 ‘허세가 아닐까’ 하는 찜찜함이다.

위압적인 권력행사 방식도 낯설기만 하다. ‘공권력에 도전하면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실세 장관’의 위협적 언사는 귀를 의심케 한다. 30여 년 전 군사정권 시절의 용어와 화법이다. ‘5년 관리권’을 위임받고선 ‘역사의 면죄부’라도 쥔 듯 거침없다. ‘우리의 선의와 완전함을 의심치 말라’며 일체의 반론을 봉쇄하고 있다. 비정규직에 대해 ‘다른 생각’을 말했다고 대통령이 나서서 꾸짖을 때부터 예고된 일이다. 각계에 포진한 ‘문위병’들은 법원 판결문까지 공공연히 난도질 중이다. 시민은 숨죽이고, 전문가는 입 닫고, 지식인은 자기검열에 한창이다.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정치 논리의 무한 확장이다. ‘비정치 분야’ 국정 이슈들이 일제히 ‘정치 블랙홀’로 빠져들고 있다. 매표 소지가 다분한 저급한 정치 구호들이 ‘정책’으로 각색되는 모습이다. 장관은 청와대와 여당에서 하달하는 ‘청부 정책’의 발표자로 전락했다. 증세 최저임금 비정규직 원전 논의에서 부총리 등 경제부처 장관들이 실종된 지 오래다. 외교·안보가 누란지위로 치닫는데도 주무부처 장관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준 적이 없다.

정치적 접근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막스 베버가 말한 ‘소명으로서의 정치’가 작동한다면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문재인 정부는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카를 슈미트식의 사나운 정치관을 내면화한 듯하다. ‘나치의 계관법학자’로 불린 슈미트는 ‘도덕은 선악, 예술은 미추, 경제는 손익 구별이 목표이듯, 정치적인 것의 본질은 적과 동지의 구별’이라 했다. 적을 필요로 하고, 적이 사라지면 또 다른 적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정치로 봤다. 지난 일이 끝없이 들춰지고 ‘적폐 전선’이 확대되는 요즘 시국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비정치'에 정치강요는 '국가폭력'

적과 동지를 따지는 정치적 셈법이라면 해법은 너무 쉽다. 동지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밀어붙이면 그만이다. 적의 비명이 클수록 동지의 물개박수도 클 것이란 계산서가 이미 나와 있다. 골치 아픈 비용은 악덕 기업주, 원전 마피아, 탐욕스러운 부자로 의제된 적들에게 떠넘기면 상황 종료다.

새 정부의 결정을 ‘나쁜 정책’이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에 오염돼 ‘정책’이 아닐 뿐이다. 한국 ‘비정치’ 중에는 일류가 꽤 된다. 삼류 정치의 간섭도 일류에 걸맞은 예우를 갖춘 대화 방식이어야 한다. 합법적이어도 정당성이 결여되면 ‘국가 폭력’에 다름 아니다. 국민의 지지가 높은데 ‘폭력 운운 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문제적이었지만 동시에 천재적이었던 슈미트가 이미 답을 제시하고 있다. ‘통치자는 결단하는 자’라는 유명한 명제를 통해서다. 통치는 여론을 좇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의지로 국익을 위해 결단하는 행위다. 정치에서 통치로, 문 대통령의 궤도 수정을 바란다.

백광엽 지식사회부장 kecor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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