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kim.chungho@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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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6번째로 신종플루 백신 납품
전자산업이나 자동차산업에 비한다면 한국의 제약산업은 많이 뒤떨어졌다. 화이자(독일), 노바티스(스위스), 로쉬(스위스) 등 세계적 제약사들과 비교가 안 된다. 그러나 혈액제제인 백신만은 녹십자의 한국산 백신이 세계적 수준에 올라 있다.
녹십자의 뿌리는 1967년에 세워진 ‘수도미생물약품’이다. 동물용백신 제조를 위해 만들어졌는데 1969년 극동제약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1971년에는 (주)녹십자로 상호를 바꿨다.
녹십자를 백신 전문 제약사로 성공시킨 사람은 허영섭이다. 1941년생으로 원래 교수가 되고자 독일에 유학 중이던 공학도였다. 그가 제약업계에 발을 들인 것은 1970년 방위산업체인 극동제약에서 근무하면서부터다. 유학생이라도 입영을 연기할 수 없도록 법이 바뀌는 바람에 허영섭은 독일 유학 중 귀국해 방위산업체인 극동제약에 입사했다.
필수의약품 국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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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허영섭은 녹십자 사장이 됐다. 필수의약품의 국산화를 녹십자의 비전으로 정한 그는 국산 신약을 개발하는 데 많은 투자를 했다. 한국 제약 기업으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시 한국 제약회사들은 해외 제약사의 약품을 복제해서 파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 상황에서 허영섭은 독자적인 신약 개발에 도전했다. 유로키나아제 등 여러 건의 성과들이 있었고 사업도 성장했다.
결정적 도약의 계기는 1983년에 찾아왔다. B형 간염백신인 헤파박스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12년 연구 끝에 이룬 성과였다. 미국, 프랑스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였다. 헤파박스 매출 덕분에 연간 매출은 그 전해의 250억원에서 528억원으로 뛰었다. 한국기업경영력 평가에서 10대 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헤파박스는 녹십자에만 성공을 안긴 것이 아니었다. 간염으로 고생하던 환자들이 수입가의 3분의 1 가격에 국산 백신으로 치료받을 수 있게 됐다. 그 덕분에 B형간염 보균율도 13%에서 7%로 떨어졌다.
민간연구소 설립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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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허영섭은 68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주식 등 유산은 본인의 뜻에 따라 3분의 2는 장학재단과 연구재단에 기부됐고, 가족에게는 3분의 1만 상속됐다. 녹십자그룹의 경영은 동생 허일섭과 허영섭의 차남 허은철 등이 공동으로 맡고 있다.
허영섭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 신약 개발의 길을 걸어간 사람, 백신 개발을 통해 한국인의 질병 치료에 기여한 기업가였다. 그가 남긴 뜻대로 녹십자가 글로벌 제약사로 성공하길 바란다.
기억해 주세요
독일로 유학 간 공학도였던 허영섭은 다소 엉뚱한 길인 제약산업에 발을 들여놓은 뒤 간염, 유행성출혈열, 신종플루 백신을 잇따라 개발해 국민 질병 치료에 크게 기여했다.
김정호 <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kim.chungho@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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