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대응엔 신속…조기 수습 '집착'
재검사·보완조사로 불신 더 키워
탈원전·증세도 '전철' 밟을까 우려
탈원전·정규직화·최저임금 인상…'선의의 정책'이 최악 결과 낳을수도
힘있는 집권초기 놓치면 정책 힘빠질까 우려
뻔히 예상되는 부작용 지적에도 속전속결
"지지도 높일 수 있겠지만 뒷감당 어떻게 하나"
[ 오형주 기자 ] 살충제 계란 파동이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문제가 터진 지난 14일 정부는 “사흘 내 전수조사를 끝내겠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전수조사 결과는 재검사와 보완조사가 거듭되면서 계속 바뀌고 있다. 21일에는 살충제에 노출된 닭이 시중에 유통됐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살충제 계란 파동과 관련, 국민에게 사과하고 “국가가 책임지고 관리하는 체계를 세우겠다”고 했다. 일파만파로 커진 부실검사 논란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번 살충제 계란 사태는 현 정부가 정책을 추진하는 방식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는 평가가 많다. “빠르고 화끈하지만 ‘디테일’에 약한 정부의 단면을 보여준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초동 대응까진 좋았지만 너무 서두른 나머지 뻔히 예상되는 문제점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살충제 성분이 처음 검출된 당일 정부 대응은 역대 어느 정부보다도 과감하고 신속했다. 14일 밤 열린 관계부처 대책회의에서는 17일까지 사흘간 전국 모든 산란계 농장을 전수조사하기로 했다. 산란계 농장이 전국에 산재한 만큼 전수조사를 사흘 만에 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부실조사 가능성이 처음부터 예견돼 있었던 것이다.
최저임금 인상과 탈(脫)원전, 증세, 비정규직 정규직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등 정부가 속전속결로 밀어붙이는 정책들 역시 비슷한 전철을 밟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벌써부터 나오는 이유다. 한 대학교수는 “정책은 입안 단계부터 부작용이 없는지를 세심하게 따져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며 “디테일을 제대로 챙기지 않은 채 정책을 속도전처럼 밀어붙이면 이로 인한 폐해는 국민에게 돌아간다”고 지적했다.
살충제 계란 파동과 관련해 정부는 처음부터 ‘조속한 수습’에만 집착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말끝마다 ‘조속’ ‘신속’을 강조했다. 하지만 정부의 이런 태도는 결과적으로 ‘졸속 전수조사’의 원인을 제공했다. 전수조사의 난맥상은 “샘플용 계란을 미리 준비해 달라고 했다”는 농장주들의 증언 등을 통해 그대로 드러났다.
부실조사 논란이 일자 정부는 뒤늦게 일부 표본에 문제가 확인된 121개 농장 재검사를 결정했다. 논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수조사 최종 결과가 나온 지난 18일 이후에도 지방자치단체 조사에서 일부 살충제 성분이 누락됐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정부는 19일 다시 420개 농장에 대한 보완조사를 결정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1일 “(살충제 계란 대응) 과정에서 관계기관 간 손발이 맞지 않는 모습이 나왔다”며 문제점을 인정했다.
◆조급증이 화를 키워
국민 안전과 직결되는 먹거리 문제는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철저히 ‘디테일’을 챙겼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전수조사가 시작된 15일부터 “전국 1200여 개에 이르는 산란계 농장에서 하루에 4000만 개가 넘는 계란을 생산하는데 어떻게 조사를 3일 내로 끝마칠 수 있겠느냐”는 ‘합리적 의심’이 제기됐지만 정부는 이를 일축했다.
1970년대 말부터 국내에서 사용이 금지된 맹독성 살충제 성분인 디클로로디페닐트리클로로에탄(DDT)이 검출됐는데도 이를 쉬쉬한 것 역시 조급증 때문이었다. 정부는 DDT가 검출된 계란이 있다는 보도(본지 8월21일자 A1면)가 나오고서야 기존에 알려진 성분 외 세 가지 살충제가 추가 검출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실토했다.
◆“디테일 부족으로 곳곳 지뢰밭”
정책 추진 과정에서 ‘디테일 부족’ 문제가 제기된 것은 살충제 계란뿐만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가 ‘화끈하게’ 내놓은 다른 정책 역시 비슷한 경로로 갈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정책을 추진하는 관가에서조차 “곳곳이 지뢰밭이라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최저임금 인상이 대표적이다. 정부는 ‘최저임금 2020년 1만원’이라는 대통령 공약에 집착해 내년부터 적용될 최저임금의 두 자릿수 인상을 사실상 유도했다. 지난달 15일 최저임금 16.4% 인상이 결정된 뒤 인건비 부담이 급격히 커진 소상공인·영세 중소기업의 불만이 제기되자 불쑥 4조원 규모의 소상공인·영세 중소기업 지원 대책을 꺼내들었다. 최저임금 인상분 일부를 재정으로 보전해주겠다는 파격적인 정책이었다. 부정수급 등 실행 과정에서의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지적엔 관계부처 태스크포스(TF)를 꾸려 지원 대상과 금액, 전달 체계 등을 구체화하겠다는 말만 했다. 일단 정책을 내놓은 뒤 디테일은 나중에 챙기겠다는 발상이라는 지적이다.
◆부작용 검토 없이 속도전 벌여
지난 2일 내놓은 정부의 세제개편안도 다르지 않다. 당초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김진표 국정기획자문위원장은 줄곧 “올해 소득세와 법인세 명목세율 인상은 없다”고 공언해왔다. 하지만 지난달 20일 김부겸 행정자치부 장관과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이 최고세율을 높이자고 기습 제안하면서 상황은 급반전했다. 결국 정부는 불과 열흘 만에 명목세율 인상을 골자로 한 세제개편안을 ‘뚝딱’ 만들어 내놨다. 법인세 인상으로 예상되는 글로벌 기업들의 국내 투자 위축 등 부작용은 제대로 검토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탈(脫)원전 및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공무원 일자리 17만 개 증원 등 역시 국민 경제 전반에 미치는 광범위한 영향 등에 대한 제대로 된 검토 과정 없이 정책 이 발표됐다. 중앙부처 한 공무원은 “신속하고 화끈한 ‘선물 보따리’로 국민 지지도는 높일 수 있겠지만 나중에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할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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