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은 돌고 돈다'…감출 수 없는 회귀본능
"다른 곳에선 이런 사진 못 찍습니다. 대부분 필름을 사용하지 않거든요."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한적한 주택가. 1970~1980년대에 지어진 주택들이 즐비한 골목에 최근 사람들이 북적이기 시작했다. 지난 17일 이곳에 자리잡은 '연희동 사진관'을 찾은 윤하람 씨(22)는 한 주 전 촬영한 12장의 필름 가운데 인화할 사진 한 장을 고른 후 곧바로 나왔다. 액자 형태의 사진을 찾으려면 장장 한 달이 걸린다. 하지만 윤 씨는 "매년 이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고 싶다"며 웃어보였다.
70년대 사진관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이 사진관은 2년 전 문을 열었다. 방배동에서 웨딩스튜디오를 운영하던 김규현 씨(31)가 사진관 주인이다. 김 씨는 옛 느낌을 담아내려고 원목과 유리창을 활용해 사진관을 직접 디자인했다. "흑백 필름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대 느낌을 살리고 싶었다"고 했다.
연희동 사진관은 주로 필름 사진을 다룬다. 촬영 기회는 단 12번이다. 한 롤에 12컷 촬영이 가능한 필름을 사용한다. 다른 사진관들처럼 수십 장씩 촬영을 할 수 없다. 필름 사진이라 포토샵 등 보정도 하지 않는다. 사진 선택까지 촬영 후 한 주, 최종 액자 수령은 한 달이 소요된다. 옛날 방식 그대로 사진을 현상, 인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많게는 하루 70팀이 방문할 정도로 인기다.
사진관 안에는 4팀이 들어갈 수 있는 대기석이 마련돼 있었다. 김 대표는 "처음 문을 열었을 때 동네 주민 분들이 '여기 있던 이전 가게들은 다 망했다'며 걱정해줬는데 이젠 지방에서도 손님이 찾아올 정도로 사진관이 알려졌다"고 말했다.
"이 엽서는 제가 올해 5월 프랑스 퐁텐블로성에서 직접 찍은 사진으로 만든 겁니다."
같은 날 연희동의 낡은 주택가 인근 상가 1층 골동품 가게를 찾았다. 가게에 들어서자 유럽풍의 자그마한 계단과 촛대, 옛 엽서가 한 눈에 들어왔다. 100여 년 전 프랑스 가정집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가게 이름은 '오데옹 상점', 주인의 취향과 감성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직장인이었던 장세희 씨는 프랑스 여행의 기억을 간직하려고 1년 전 상점을 열었다. 그는 "판매 목적이라기보다는 스스로 좋아서 하는 '취미 생활 확장판'이다"라며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그곳에 대한 기억과 감성으로 공간을 새로 꾸민다. 지금까지 내부 공간을 4차례 바꿨다"고 귀띔했다.
오데옹 상점은 장 씨가 현지에서 구매한 소품뿐 아니라 직접 제작한 섬유·원목 제품, 황동 트레이, 엽서 등도 판다. 주인과 취향이 비슷한 단골들에게는 '비밀 아지트' 같은 공간이 됐다. 장 씨는 "물건마다 사연이 있다. 어느 것 하나 그냥 산 게 없다"며 "취향을 공유하는 분들이 많이 찾는다"고 덧붙였다.
최근 들어 이 같은 예스러운 감성의 '복고풍'이 주목받고 있다. 필름 사진과 빈티지 숍을 비롯해 바이닐(LP판), 턴테이블 등 아날로그 시장이 눈에 띄게 커졌다. 올해 6월엔 서울 성수동에 국내 유일의 LP 제작공장 '바이닐 팩토리'가 문을 열었으며 파산했던 코닥이 필름 생산을 재개했다. 필름 카메라를 표방한 사진앱 '구닥'은 출시 열흘 만에 국내 앱스토어 유료 앱 전체 1위를 차지했다.
편리하고 빠르게만 돌아가는 세상에서 복고 열풍이 부는 이유는 뭘까. 너무 빨리 변하는 유행에 대한 '반작용'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고, 품이 들더라도 사람 냄새가 나는 것에 대한 욕구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복고 열풍의 주소비층은 의외로 20대 대학생들이다. 아날로그를 경험하지 못한 청년층에게는 '독특하고 새로운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휴대폰 대신 턴테이블에 LP를 올려놓고 음악을 듣고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젊은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런 트렌드는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중심으로 크게 확산되는 추세다.
연희동 사진관 김규현 대표는 "필름 카메라의 존재조차 몰랐던 20대 초반 고객들이 사진을 찍고 간다. 손으로 직접 만지고 질감을 느낄 수 있다는 데 신선함을 느끼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젊은이들에게 '복고'는 옛것이 아니라 색다른 것이다.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즐기려는 욕구로 볼 수 있다"며 "디지털 발달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나는 일종의 역(逆)트렌드 현상 "이라고 풀이했다.
조아라 한경닷컴 기자 rrang12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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