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일본에서 유행한 용어 중에 ‘손타쿠(忖度)’라는 것이 있습니다. 중국 고전 ‘시경(詩經)’에서 유래했다는 이 단어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미루어 헤아린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아베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를 정치적 곤경에 처하게 한 사학스캔들 공개 과정에서 일본 정부 관료들이 아베 총리의 뜻을 미리 짐작해 ‘알아서 기었다’던 모습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덕에 일본 사회에 널리 퍼졌습니다.
사실 ‘손타쿠’는 일본 정계뿐 아니라 비즈니스계에도 널리 퍼져있는 문화이기도 합니다. 일본 기업에 수도없이 많은 ‘고문’ ‘상담역’ 등의 고위직제가 그같은 문화의 일단을 반영합니다. 회장, 사장 등 현재 경영을 책임진 인물 외에 옛 임원들이 고문 등을 맡으면서 영향력을 계속해서 행사하고 있는 것이지요. 일본 경제산업성 설문조사에 따르면 도쿄증권거래소 1부와 2부에 상장된 2502개 상장사 중 약 60% 기업에서 고문·상담역 등의 직제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 경제계에서는 제도적으로 ‘손타쿠’가 존속할 기반이 점점 줄어들 것 같습니다. 바로 2018년부터 도쿄증권거래소에 상장된 기업에 대해선 ‘고문’ ‘상담역’ 등의 업무내용을 공개토록 하는 제도가 도입됐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일본 기업에서는 전임 사장이나 임원 같은 ‘올드 보이’들이 후배 경영진에게 유무형의 압력을 가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전직 임원들이 고문이나 상담역 등의 지위를 교두보 삼아 후배들의 경영활동에 시시콜콜 ‘감놔라~, 배놔라~’했다는 것입니다. 연공서열 문화가 강한 일본에선 고참 선배들의 발언을 무시하기 어려운게 사실이었다고 합니다. 도시바를 비롯한 일본 기업의 몰락 사례에선 이같은 ‘올드 보이’들의 지나친 간섭이 경영실패의 원인으로 빠짐없이 거론되기도 합니다.
후배 경영자들이 전임자들의 심리를 거스르는 것을 꺼려하는 ‘손타쿠’ 탓에 일본 기업의 가치가 훼손되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고, 이에 따라 제도적으로 ‘손타쿠’의 뿌리를 자르려는 시도가 나오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구체적으로 도쿄증권거래소가 발표한 ‘기업 지배구조 시스템에 관한 실무지침’에는 “상담역·고문 제도가 재계 활동이나 거래처와의 관계 유지 등에는 장점이 있는 반면 부당한 영향력 행사 등도 있었다”고 공개적으로 지적했습니다. 이에 따라 공과를 명확하게 병기할 것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경영진이 더 과감하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는 모토로 일본 경영계에서 ‘손타쿠’ 타파 움직임에 힘이 실리고 있기도 합니다. 앞으로 회사 행사나 경영활동 중에 ‘올드 보이’가 참석한다면 주주들에게 ‘왜 그 사람이 참석했는지’ 설명해야 하는 시기가 일본에도 도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러설 때를 아는 것’의 중요함은 정치나 행정 등 다른 사회영역 뿐 아니라 경영에서도 변함없이 통용되는 법칙인가 봅니다.
도쿄=김동욱 특파원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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