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차례 모두 서울 동부이촌동 그의 자택을 찾아갔다. 연세대를 대표하는 스타 교수였건만 정작 연구실은 그에게 편한 공간이 아니었다. 작품과 현실의 마광수는 꽤 간극이 컸다. 《가자, 장미여관으로》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즐거운 사라》에서 작가 마광수는 대담해 보였다. 직접 만난 마 교수는 달랐다. 수척하고 피로한 모습이었다. 적어도 2000년대 들어서는 그랬다. 집 서재에서 인터뷰할 때마다 줄담배를 피워 물곤 했다.
야한 소설의 작가 정도로 알려진 대중적 이미지와 달리, 그는 ‘윤동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20대에 교수가 된 천재형이었다. “성(性)에 솔직해지자”는 지론이 촉망받던 연구자의 인생 항로를 바꿨다. 필화 사건, 해직과 복직, 동료 교수들의 따돌림, 교수 재임용 탈락 통보 등 굴곡이 이어졌다.
해서 말년의 마광수는 쓸쓸하고 우울했다. 그는 《즐거운 사라》 때 섰던 법정을 무서워했다. “재판이라면 이가 갈린다”고 했다. 이혼 후 함께 살던 노모는 재작년 별세했다. 스스로는 지난해 정년퇴임했다. 해직 경력 때문에 명예교수도 되지 못했다. 더 큰 걱정은 생활고였을지도 모른다. 몇 해 전부터 ‘전과자’ 이력 탓에 퇴임 후 연금을 못 받는다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지막 인터뷰 말미에 그는 “날 쫓아낸 동료 교수들을 복도에서 만날까봐 연구실에서 나가는 게 두렵다. 만나면 하루 종일 가슴이 떨린다”고 털어놓았다. ‘아, 정말 심약한 사람이구나.’ 부고를 접하고 그 생각부터 났다. 여린 천성이 풍파를 겪으면서 남은 삶을 조금씩 갉아먹었으리라.
외설 논란으로 기성세대와 불화했던 생전의 마 교수는 늘 신세대에 기대를 걸었다. 학생들도 그가 어려울 때마다 힘이 되어줬다. 필화 사건으로 정규 강의를 하지 못하면 연대생들이 100명씩 몰려와 그의 ‘무학점 강의’를 듣던 시절이 있었다. 졸업을 맞은 국문과 학생들이 “후배들에게 남길 것은 마 교수의 강의뿐”이란 현수막을 걸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마광수에게 어울리는 단어는 ‘청춘’ 같다. 여린 심성이 세심한 감수성으로 빛나고 때로는 자의식 강한 솔직함으로 표출되는, 젊음. 누구나 어느 정도는 그렇겠지만 누구보다도 마광수에게는 그게 삶을 살아내는 원천이었을 것이다. 그의 명복을 빈다.
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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