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는 간데없고 공기관 신뢰도 떨어져
배려와 신뢰의 사회적 자본부터 축적해야
정갑영 < 연세대 명예특임교수, 전 총장 >
주말에 우연히 ‘인턴’이라는 영화를 보게 됐다. 40여 년의 직장생활을 마무리하고 노년의 허전함을 달래던 벤 휘터커(로버트 드 니로 분)가 인터넷 쇼핑몰을 창업한 최고경영자(CEO) 줄스 오스틴(앤 해서웨이 분)의 인턴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모험을 그린 영화다.
지역사회에 대한 공헌 차원에서 시니어 인턴을 뽑긴 했지만, 60대 노인이 첨단 인터넷 회사의 30대 CEO를 돕는다니, 순탄하게 나갈 리가 없다. 벤은 새로운 각오와 인내로 모든 노력을 다하지만, 누구한테도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며 아무런 일감조차 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오랜 경륜으로 쌓은 지혜로 시니어 인턴의 한계를 극복하며, 점차 모든 직원의 멘토로 거듭나고, 결국은 노인을 질색하던 줄스까지도 가장 신뢰하는 정신적 지주로 삼게 된다.
영화의 작품성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 ‘인턴’에는 각박한 우리 현실에서 함께 공유하고 싶은 장면이 많다. 특히 옷장에 가지런히 정리된 손수건에 감탄하며 젊은 직원이 용도를 물을 때, 벤은 “남에게 빌려주기 위해 갖고 다니는 것”이라며 “예의 바른 시대의 마지막 흔적”이라고 답한다. 눈물을 연상케 하는 손수건이 타인에 대한 배려의 상징으로 인용되며, 마지막 장면도 손수건에 대한 은유로 끝난다.
사춘기의 감성 어린 대사 같은 장면이 갑작스레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신뢰를 찾아보기 힘들다. 배려는커녕 10대의 폭력은 더욱 잔인해지고, 인터넷에는 무책임한 비방과 신상털기가 판을 치며, 멀쩡한 인물도 이념과 코드가 다르면 적폐세력으로 타도의 대상이 된다. 사사건건 합리적 근거나 과학적 증거가 전혀 없는 선동이 아무런 죄책감 없이 보편화돼 가고 있다.
과거의 바람직한 정책이나 업적은 깡그리 폄하하고, 오히려 먼지 떨기에 열중하니 좋은 역사가 쌓여가질 않는다. 자신의 인권은 무한히 존중받기를 요구하면서, 남의 인격은 무책임하게 살해하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악순환이 풍미하고 있다. 일부에서 표면화된 ‘갑’과 ‘을’의 잘못된 관행도 배려가 없는 일방적인 무시와 횡포의 결과 아니겠는가. 지금 한국 사회는 역지사지(易地思之)로 남을 생각하고, 서로를 신뢰하는 문화가 갈수록 척박해지고 있다.
나아가 개인을 넘어 정부와 언론, 사법부 등 공적기관에 대한 신뢰도 크게 떨어지고 있다. 오락가락하는 정책과 인기에 편승한 근시안적 행태, 근거 없는 낭설을 확대 재생산하는 풍토가 만연하기 때문이다. 최근 ‘살충제 계란’과 ‘생리대 파동’에서도 과학적 진실이나 정부에 대한 신뢰는 찾아보기 힘들다.
내년에 한국 경제는 드디어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어 선진국에 진입한다고 한다. 단순한 물량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당당히 선진권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득만 높아진다고 선진국으로 존경받는 것은 아니다.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는 경제학에서도 최근에는 선진화의 척도로 신뢰에 기반을 둔 사회적 자본을 중시한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믿고 배려하며, 사회를 구성하는 주체와 기관들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지속 성장이 가능하고, 풍요롭고 윤택한 문화도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서로에 대한 배려와 신뢰가 척박한 문화에서는 마음이 여유롭지 못하며 이웃과 소통하기도 어렵고 늘 불안하다. 내 이웃이 나를 근거 없이 비방하는 잠재적 폭력자일 수도 있다면 어떻게 일상이 편안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유로 한국 사회가 너무 험악하고, 무서워져 간다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일부에서는 정의로운 사회로 가는 험난한 과정이라고 하지만, 정의의 기준도 신뢰와 배려의 정도에 따라 크게 달라지지 않는가.
선진국의 꿈은 결코 소득만으로는 달성되지 않는다. 물질적인 여유가 생긴다 해도 일상의 삶은 오히려 더 황폐해질 수 있다. 게다가 한반도의 긴장이 높아지며 위기와 불안 심리까지 팽배한다면 한국 사회는 어디로 가겠는가.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절실한 현안은 선진국에 걸맞은 신뢰의 문화를 축적하는 일이다. ‘내로남불’ 하며 남 탓하지 말고, 당장 오늘 나부터 이웃을 배려하는 손수건이라도 들고 나가보자.
정갑영 < 연세대 명예특임교수, 전 총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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