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청양군 청양읍 청양시장. 2와 7로 끝나는 날에 5일장이 선다. 지난 2일 시장 양옆으로 좌판이 길게 깔렸다. 길가 한켠에서 돗자리를 깐 채 밭에서 따온 채소를 파는 시골 할머니들은 삼삼오오 모여앉아 얘기를 나눴다.
시장 광장과 맞닿아 있는 연갈색 2층 벽돌 건물 앞은 또 다른 풍경이다. 좌판 대신 마대자루를 짊어진 노인들이 모여있다. 자루 안에는 바짝 마른 빨간 알갱이들이 가득하다. 각 수확해 말린 구기자 열매다. 청양구기자원예농업협동조합이 잠시 후 이 열매들을 모두 사갔다.
조합 사무실에서 돈봉투를 들고 나오는 농민들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이날 구기자를 판 농민들은 구기자 한 근(600g)당 2만6000원씩을 받았다. 이들은 “술 한 잔 하자”며 기분좋은 발길을 재촉했다. 농민들의 웃음 뒤에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최근 구기자 값이 크게 뛰었다. 구기자 포대를 옮기던 복영수 청양구기자농협 조합장은 “작년 초만 해도 한 근 가격이 1만5000원 선이었다”고 설명했다.
올들어 구기자 가격이 오른 건 공급 감소가 아닌 수요 증가 때문이다. 한약재로만 쓰이던 구기자가 건강기능식품 및 차, 즙 등 다양한 제품의 원료로, 사용처가 확대됐다는 설명이다. 구기자 수요를 늘린 대표적인 인물로 복 조합장과 구기자 재배 농민들은 홍성빈 바이오믹스 대표(54)를 지목한다. 1990년대 후반부터 인삼, 구기자, 오미자 등 농산물에서 식품·의약품·화장품에 들어가는 원료를 뽑아내 상품화해온 식품벤처사업가다.
홍 대표는 2000년대 초반부터 주말마다 청양에 머물며 구기자 농사도 짓고 있다. 그가 주도해 설립한 청양구기자수출영농조합은 청양읍 벽천 2리에 있는 1만여 평(3만3000여㎡) 땅에 구기자 비닐하우스 25개동(재배면적 6000여평)을 세워 구기자를 키우고 있다. 청양 구기자 농장 중 가장 큰 규모다.
유통업을 하던 홍 대표가 구기자 재배에 관심을 갖고 청양을 처음 찾은 건 2001년이다. 20대 중반부터 개인 사업을 해온 그는 1990년대 말 건강기능식품 시장 진출을 계획했다. 소득수준이 높아지고 고령인구가 늘어나면 건강기능식품을 찾는 수요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홍삼을 생각했다. 하지만 강력한 경쟁자들이 많았다. 정관장 한삼인 등 대형 브랜드들과 경쟁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 게 구기자다.
“건강기능식품 사업을 준비하면서 한의학 책들을 많이 봤습니다. 이들 책에선 구기자가 인삼과 거의 같은 비중으로 나오더라고요. 저도 그렇고 사람들이 구기자라고하면 잘 모르는데 도대체 어떤 약재이길래 그처럼 적혀있는지 궁금했어요. 알아보니까 청양이 구기자가 유명하다고 해서 바로 청양으로 갔습니다.”
2000년대 초반만해도 구기자는 농민들의 주요 수익원이 아니었다. 한의원이나 약초상 외엔 찾는 곳도 드물었다. 홍 대표는 당시 청양에 내려가 구기자조합장을 처음 만났을 때 일화를 들려줬다. “조합 사무실에 들어와 조합장에게 인사하고 차 마시면서 이야기하는데 그 짧은 동안에 농민 세네명이 연이어 찾아와서 조합 가입비를 돌려 달라고 하더라고요. 더 이상 구기자를 키우지 않겠다는 거였어요.”
겉으로 보이는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홍 대표는 반대로 생각했다. “뚜렷한 경쟁자가 없어 제대로 된 상품만 개발하면 구기자 시장을 키울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한의학 서적과 국내외 논문을 읽으며 공부한 덕분에 구기자의 효능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거든요.” 중국에선 구기자를 약재뿐 아니라 식재료로도 널리 쓰고 미국과 유럽에선 고지베리(Goji Berries)란 이름으로 불리면서 건강에 좋은 ‘슈퍼 푸드’로 소비된다는 사실도 홍 대표가 구기자 상품 개발에 나선 배경이다.
구기자조합과 구기자를 활용한 상품개발에 관한 양해각서를 맺고 연구를 시작했다. 2003년엔 말린 구기자를 갈아서 가루 형태로 티백에 담은 구기자차를 내놨다. 구기자 영양분이 단시간 내 많이 우러날 수 있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2006년엔 한걸음 나아갔다. 구기자 추출물을 섞은 술을 내놨다. 백세주와 소주를 섞어 마시는 일명 ‘오십세주’가 술자리에서 인기를 끌던 시기다. 약주 시장이 커질 거라 예상하고 그동안 사업을 통해 번 5억원 가량을 투자해 술을 개발했다. 구기자에 얽힌 중국 전설을 본떠 ‘할머니의 비밀’이라고 이름붙였다. 하지만 이 즈음 대형 주류 회사들이 순한 소주들을 잇따라 출시했고 소주와 섞어마시던 약주들의 인기도 시들해졌다. 할머니의 비밀도 시장에서 퇴장했다. 실패였다.
구기자로 건강기능식품을 개발해 정면승부를 펼쳐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 무렵이다. ‘건강기능식품에 관한 법률’에 따라 건강기능식품 인증을 받지 못한 제품들은 광고에 제한을 받는다. 홍 대표는 “정식 건강기능식품을 개발해 구기자 효과를 제대로 알리면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건강기능식품 개발로 방향을 바꾼 뒤 본격적인 투자에 들어갔다. 고부가식품연구개발을 위한 정부 지원금 3억원, 중소기업청의 구매조건부기술 지원금 5억원을 포함해 20억원 가량을 연구개발에 투입했다. 연구개발은 9년간 이어졌다. 2014년 10월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기억력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건강기능식품으로 정식 인증을 받았다. 바이오믹스는 구기자 건강기능식품 판매를 통해 지난해 150억여원의 매출을 올렸다.
2000년대 중반부터 청양구기자농협 조합장을 맡아 홍 대표와 손을 맞춰온 복 조합장은 구기자 건강기능식품이 나오면서 농민들에게 전혀 새로운 시장이 열렸다고 설명했다. 복 조합장은 “조합원 980명 중에는 이름만 걸어놓거나 텃밭 수준의 구기자 농사 짓는 분들이 많았는데 구기자 가격이 오르면서 최근 2~3년 새 구기자 농사 규모를 키운 농가가 부쩍 늘었다”고 설명했다.
홍 대표와 복 조합장은 구기자 재배 과정을 자동화하는 방안을 찾고있다. 구기자는 대개 9월부터 11월까지 4~5차례에 나눠서 수확한다. 한 나무에서 1년에 보통 두 번 열매를 딴다. 수확을 위한 인건비 부담이 작지 않다. 상당수 농가는 인력을 구하는 단계에서부터 어려움을 겪는다.
홍 대표는 비닐하우스 안에 구기자나무를 덜 심는 대신 나무 사이의 간격을 넓혔다. 그 사이를 모터가 달린 기계가 지나가면서 구기자나무를 흔들어 다 익은 열매가 바로 그물에 떨어지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그는 작년엔 오미자로 만든 제품도 건강기능식품 인증을 받았다. 국내 오미자 주산지인 경북 문경의 농민들로부터 오미자를 납품받아 제품을 제조한다. 국산 농산물을 원료로 한 건강기능식품을 개발하면 시장이 커져 회사와 농민이 함께 이익을 얻는 상생구조가 형성된다는 게 홍 대표 설명이다.
“외국에서 수입한 구기자, 오미자 원료로 제품을 만들 수도 있고 그러면 회사는 돈을 더 벌 수도 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제가 직접 키운 구기자, 바로 내 옆에서 내가 아는 농부가 키운 구기자로 제품을 만들었을 때만큼 자기 제품을 믿지는 못할 거 같아요. 자기가 완전히 믿지 못하는 제품을 고객들한테 팔 수는 없잖아요. 주말에 청양에서 구기자 농사를 지으면서 상품 개발에 필요한 아이디어도 많이 얻었어요. 농식품업체를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직접 농사를 짓지는 못하더라도 농업에 대한 지식은 충분히 있어야 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청양=FARM 홍선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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