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가 농산물 직거래를 제대로 해보고 싶어서 로고 디자인을 하려고 합니다. 비용이 얼마나 필요하죠”(농부), “초기 디자인부터 하게되면 기본 70만원부터 시작하고요”(디자이너), “뭐가 그렇게 비싼가요”(농부), “간단해보여도 최소한 2~3일은 작업해야 하는 거라서, 그정도는 필요...”(디자이너) “뚜뚜뚜...”(전화음)
농부들도 안다. 예쁜 게 들어가면 소비자들이 좋아할 것이라는 사실을. 특히 도매시장에 내다 팔 것이 아니라 직거래로 소비자들을 직접 만날 것이라면 더더욱 그게 필요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디자인을 의뢰하는 농부들의 전화는 대부분 위의 대화처럼 진행된 후 감정만 상한 채 끝난다고 한다. 농부가 디자인을 바라보는 방식과 디자이너들이 생각하는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조현준 디팜 대표(32)는 농부와 디자이너의 이 같은 인식 차이에 주목했다. “농부에겐 우수 디자인을 좀 더 쉽게 제공하고 디자이너들에겐 상품 단가가 좀 낮더라도 농업이라는 새 시장이 열리고 있다는 점을 알리는 매개체가 되고 싶습니다.”
동국대 국제통상학과에 다니던 그는 2014년 이런 사업 아이템으로 학교 창업지원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당시 지도교수가 농업 관련 무역 아이템을 만들면 성공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던 게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 말을 듣고 공부를 해보니 한국의 농산물이 디자인이 더해지면 더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고 그게 조 대표와 농민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 결과 농부와 디자이너를 연결해준다는 의미의 ‘농부릿지’와 농부를 위한 디자인 마켓플레이스(오픈마켓) ‘디팜’이 탄생했다.
◆디자인 진입장벽 낮추기
조 대표가 만든 농업인 전용 온라인 오픈마켓 디팜은 택배 배송용 박스, 각종 문구가 새겨진 테이프와 스티커, 명함, 로고 등을 판다. 디자이너들이 직접 디자인한 명함과 로고 시안을 등록하면 농부가 선택해 구매하는 식이다. 농장 이름과 기본 정보 등을 보내면 제작이 시작된다. 첫 구매자일 경우 비용을 좀 더 내고 해당 디자인을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택배 상자와 테이프 등은 디팜이 직접 디자인한 것을 판매한다. 조 대표는 “대단할 것은 없어 보이지만, 직거래로 소비자들에게 제품을 판매하고 싶어하는 농부들이 꼭 필요하다고 느끼는 상품들”이라고 소개했다. 농부 개개인에 맞춘 차별화된 디자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디자인에 관심이 없던 농부들은 신기하고 재밌다는 반응을 보인다고 그는 덧붙였다.
조 대표는 디팜이 소규모 농가을 위한 플랫폼이라고 설명했다. “미적으로 뛰어난 독립적인 디자인을 하는 것도 의미있지만 소농들은 비용 부담 때문에 그렇게 하기 어려워요. 디팜의 제품들은 일단 만들어진 제품을 소량 주문할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저렴합니다.”
조 대표는 디팜을 통해 디자인에 대한 농부들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게 목표라고 했다. “농부들이 디자인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만 그게 뭔지 정확히 모르고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디팜은 ’디자인 요소가 가미된 독특한 기성품‘이에요. 디팜을 통해 농부들이 디자인과 좀 더 친해지면 좋겠어요.”
◆농부와 디자이너간 갈등 줄이기
조 대표가 이런 디팜의 모델을 중심으로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은 창업 초반 겪었던 수많은 실패들 때문이다. 조 대표도 원래는 브랜드 디자인을 중심으로 회사를 운영하려고 했다. 전문 디자이너와 농부를 1:1로 매칭하는 농부릿지 사업을 중심으로 회사를 운영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일단 가격을 듣고 바로 전화를 끊는 농부들이 많았고요. 가격 등을 맞추고 어렵게 세부 디자인을 진행하는 와중에도 열에 서넛은 어그러지더라고요.”
가장 큰 문제는 인식과 언어의 차이였다. 예컨대 “싱그러운 느낌의 로고”라고 하면 농부들은 대부분 흙과 햇빛, 농부의 땀방울 같은 이미지를 떠올린 반면 디자이너들은 이슬, 신선한 샐러드의 느낌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농부는 돈을 냈는데 왜 맞춰주지 않냐며 불만을 제기했고 디자이너는 자신의 포트폴리오에 도움이 되지 않는 디자인은 아예 하고 싶지 않다고 하는 식이 지속됐다.
“전문 디자인은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사업의 방향을 바꿨습니다. 농부들에게 좀 더 쉽게 디자인을 소개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해 디팜과 같은 오픈마켓 형태의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디자이너와 1:1로 매칭해 전문적인 디자인을 해주는 컨설팅 사업도 진행한다. 특히 젊은 농부들 사이에선 디자인의 가치를 알아주고 의뢰를 하는 경우도 많다. 최근에는 홍천군 4H 연합의 브랜드 ‘유스 파머’를 직접 디자인했다. 강원도농촌융복합산업지원센터의 CI도 제작했다. 한 달에 4~5건 정도는 꾸준히 브랜드 디자인을 하고 있다.
“사실 돈을 버는 것은 이런 대형 디자인 작업들이에요. 여기서 번 돈을 오픈마켓인 디팜에 투자하고 있죠. 언젠가 디팜을 통해 디자인에 눈을 뜬 농부들이 더 많아지면 사업은 한번 더 뛰어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농부는 수긍 그러나 디자이너는
농부릿지와 디팜 서비스를 통해 벌어 들이는 매출은 1년에 3억원 수준이다. 매출이 많은 수준은 아니지만 농부들 사이에서는 어느정도 입소문이 났다. 약 200여명의 농부들이 제품을 구매했, 그중엔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구매를 해주는 단골도 생겼다. 덕분에 스탬프, 제품 패키지 디자인 상품 등 새로운 아이템도 꾸준히 개발하고 있다. 농부들은 어느정도 디자인과 친해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디자인 업계의 시선이다. 디자이너들은 아직 농부들과 그렇게 친해지지 않았다는 게 조 대표의 판단이다. “한번은 농업과 관련된 강의를 하러 간 적이 있는데, 디자인 전공을 하는 학생에게 교수님이 디팜에 대해 디자인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회사라는 평가를 하셨다는 말을 들었어요. 제가 하는 일이 진정한 디자인이 아니라, 만들어 놓은 탬플릿을 파는 장사에 불과하다는 취지였어요.”
그는 디자인 업계의 시선을 이해한다고 했다. “일반적인 산업 디자인에 비해 농업 관련 디자인의 보수가 낮은 것은 사실이에요. 저처럼 오픈마켓 형태로 하면 가격은 더 낮아지죠. 하지만 농업이 그동안 디자인에 대해 관심 없던 산업에서 이제 디자인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시선을 조금만 바꾸면 디자이너들에게도 새로운 시장이 열리는 거죠.”
조 대표는 올해 회사 규모를 줄였다. 대학에서 지원하던 창업 지원이 창업 후 일정 기간이 지나 끊겼기 때문이다. 조 대표와 디자이너 등 8명이던 직원도 4명으로 줄였다. 사무실도 좀 더 작은 곳으로 옮겼다. 조 대표는 “본격적인 생존경쟁이 시작됐다”고 했다.
그는 힘들긴 하지만 미래는 밝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 대표가 기대를 거는 것은 귀농귀촌 바람이다. “귀농귀촌이 늘어난다는 건 일단 저희의 잠재 고객인 농부들이 늘어나는 거잖아요. 게다가 도시에 살던 사람들은 디자인에 어느정도 익숙한 측면이 있잖아요. 귀농인들이 멋진 디자인으로 농촌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면 기존의 농부들도 디자인에 기꺼이 돈을 지불하지 않을까요.”
FARM 강진규 기자/최형욱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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