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악기도 잠을 잔다?

입력 2017-09-26 18:39  

김해숙 < 국립국악원장 hskim12@korea.kr >


가야는 우리에게 잊혀진 왕국 같은 느낌이다. 일찍이 철기문화를 이뤘으나 나라가 멸망해 신라에 흡수됐다. 나라는 망했어도 가야왕국 현악기인 가야금은 그 이름 그대로 1500년 가까이 우리 민족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지터류(상자 모양 공명통 위에 현이 얹혀 있는 악기류) 악기가 가야금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연주 형태와 수용 방법은 중국과 다르고 일본과도 다르다.

가야금은 명주실과 오동나무 통의 울림을 맨 살갗과 손톱을 이용해 소리 낸다. 음량이 별로 크지 못하면서 명주실 장력은 어찌나 변덕스러운지. 전문연주자들은 밤톨 같은 여문 소리를 얻기 위해 손가락에 물집이 잡혀가며 강인한 명주실과 십수 년 싸운다.

옛 어른들은 여름 장마에는 가야금을 치지 않고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야 소리가 제대로 울린다고 했다. 명주실의 변덕 때문이다. 비단옷을 입어본 사람을 잘 알 것이다. 비단은 옷 태가 좋아도 빨래에 세심함이 필요하다.

비단옷과 가야금 줄은 성분이 같다. 습기에 약해 줄 장력이 늘어나면 음정이 제멋대로 춤춘다. 이때 연주자는 가야금을 살살 달래서 음정을 조절해야 한다. 명주실 장력이 어떤 상태이든 이에 적응하는 훈련은 가야금 연주자에겐 필수 코스다. 가야금은 큰 소리로 여러 악기를 호령하지도 못한다. 피리가 큰 소리로 불어 젖히면 가야금은 그 순간을 피해야 한다.

그럼 몸통은 항상 잘 울리는가? 오동나무를 어떻게 말렸는지, 나무 윗동인지 뿌리 쪽인지, 몇 년을 말렸는지에 따라 울림이나 성질이 모두 다르다. 통의 두께, 줄의 굵기, 연주자의 손가락 힘, 솜씨, 공력 등이 어우러져야 멋진 소리가 난다. 또 가야금은 몸통 위에 안족(줄을 받치는 기러기 발 모양의 기둥)이 얹혀 있기 때문에 몸통의 훼손이 심해진다. 전문연주자는 연주용 악기를 별도로 관리해야 한다.

한번은 중요한 녹음이 있어 아침부터 악기를 달래고 있었는데, 처음 몇 시간은 영 반응이 없었다. 악기 수명이 다했나, 내 감정이 무너졌나 하고 인내심으로 버틸 수밖에. 오후가 지나서야 비로소 교감이 느껴졌다. 그동안 악기가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악기도 잠을 잔다. 깨달음이 참 더뎠다.

가야금은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듯 하는 음색과 섬섬옥수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옛 가야금 명인은 남성이 더 많았다. 연주를 잘하는 손은 노동자의 손에 가깝다.

가야금이란 악기의 예민함, 섬세함, 까탈스러움은 만만치 않았던 가야왕국 문명의 결과는 아닐까. 이토록 영민한 가야금 소리가 오랜 세월 이 땅에 울려 퍼지고 있음에 감사하다.

김해숙 < 국립국악원장 hskim12@korea.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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