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은 기자 ] 1998년 외환위기 때 웅진코웨이(현 코웨이) 창고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던 정수기를 본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은 고민에 잠겼다. 이러다 회사가 부도날 수 있겠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차라리 나눠주자’는 생각이 스쳤다. ‘코디’로 불리는 주부사원들을 고용해 30분의 1 가격에 정수기를 빌려줬다. 국내 소비재 렌털(대여) 사업의 시작이다. 소유에서 대여로, 유통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1998년 894억원이던 매출은 5년 만에 8350억원으로 늘었다. 위기는 새로운 스타를 낳고, 새 시장을 열어준다. 국내 렌털 시장은 매년 급성장하고, 품목도 점점 다양해졌다. 렌털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됐다.
◆춘추전국 시대 맞은 렌털 시장
렌털은 전통적으로 생활가전 중견기업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자본력과 시스템을 갖춘 대기업이 속속 진출하면서 ‘춘추전국’ 시대가 됐고, 치열한 쟁탈전이 시작됐다.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승부하는 오프라인 백화점도 렌털 시장에 뛰어들었다. 현대백화점은 부피가 크고 가격이 비싼 여행가방 구매를 망설이는 고객이 많다는 점에 착안해 고급 여행가방 렌털 서비스를 운영 중이다.
현대홈쇼핑은 600억원을 출자해 렌털·케어 사업을 할 현대렌탈케어 법인을 설립해 본격적인 렌털 사업에 뛰어들었다. 온라인몰도 렌털 시장에 도전하고 있다. SK플래닛의 11번가는 정수기, 비데, 공기청정기 등 렌털 제품을 한데 모은 ‘생활플러스 렌탈숍’을 열었다. 의류와 가방 제품을 한 달간 대여할 수 있는 ‘프로젝트 앤’도 선보였다.
편의점 GS25를 운영하는 GS리테일은 정기 주주총회를 통해 정관을 변경하고 사업 목적에 렌털임대업을 추가했다. 홈쇼핑의 렌털 상품 편성 비중은 매년 높아지고 있다. 롯데홈쇼핑의 렌털 매출은 작년보다 16%가량 증가했다. 렌터카 1위인 롯데렌탈은 한 달 전 렌털 플랫폼인 ‘묘미’를 오픈하고 소비재 대여를 시작했다. 롯데렌탈 관계자는 “다이슨 청소기와 스토케 유모차 등 고가 제품에 대한 소비자 인기가 높다”며 “중장년층 남성 고객들이 많은 것도 특이한 점”이라고 분석했다.
◆불경기·트렌드 먹고 자라는 사업
역설적이게도 렌털 시장이 커지는 가장 큰 요인으로 불경기가 꼽힌다. 경제 저성장과도 관련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경기침체를 먼저 겪은 일본 등 다른 나라에서도 렌털은 호황이다. 렌털의 성장은 높은 수준의 소득을 얻고 있으면서도 소득 증가율은 낮은 현 한국 경제 상황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욕구는 변하고 기술은 빠르게 진화한다. 예전엔 물건을 소유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신제품과 신기술이 하루가 멀다 하고 등장하면서 소비 시간은 줄었고 여러 제품을 쓰고 싶어하는 욕구는 커졌다. 1~2인 가구가 늘고 있는 것도 중요한 원인이다. 기업 입장에서도 렌털 사업은 매력적이다.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은 “렌털은 원가 등 비용을 확 줄일 수 있는 유통방법”이라며 “소비자와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했다.
소비절벽 우려 속에서 렌털의 성장이 내수시장과 서비스업 활성화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김재필 KT경제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불필요한 지출은 줄이고 개인의 만족을 높이는 스마트한 소비가 나타나고 있다”며 “필요한 때 필요한 만큼만 빌려 쓰는 ‘공유형 렌털’이 새 시장을 만들고 있다”고 전망했다.
김정은 기자 likesmil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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