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혁신성장에 드리워진 그림자

입력 2017-10-12 18:09  

"기업가 위에 권력 있다는 사회
보수·진보 모두 박정희와 경쟁
기업가 자유롭게 하는게 본질"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경영과학박사



경제사학자 로버트 힉스는 대공황이 ‘뉴딜’로 대표되는 케인스 처방에도 왜 그토록 길었는가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다. 기업활동을 포기하게 하는 이른바 ‘체제 불확실성(regime uncertainty)’ 용어는 여기서 등장한다. 기업에 임금을 올리라고 압박하는 등, 요즘 문재인 정부 식으로 하면 ‘소득주도성장론’이 지배하던 시절이다. 많은 기업가가 각종 세금과 규제, 사회주의화를 방불케 하는 정부 정책이 기업의 이윤추구 행위와 자유시장경제를 위협한다고 느꼈다. 기업활동은 위축됐고 대공황은 그만큼 깊어졌다.

미국이 기업가가 혁신을 주도하는 나라가 된 배경엔 이런 역사적 교훈도 작용했지 싶다. 시장경제와 자유로운 기업활동이라는 가치의 중요성이다. 적지 않은 미국 기업가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반(反)이민 행정명령에 반기를 들고, 백인 우월주의 시위 양비론에 대통령 자문위원직을 탈퇴한 근저에도 이런 기본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기업가와 권력 관계가 이 정도는 돼야 기업할 맛이 나고 혁신도 가능하지 않을까. 규제가 무섭고, 정부 지원을 못 받을까 두렵고, 세무조사에 떨어야 하는 사회면 꿈도 못 꿀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4차산업혁명위원회를 출범시키며 ‘혁신성장’을 주문했다. 유감스럽게도 대통령 연설문을 몇 번이고 읽어봐도 무엇이 혁신성장이라는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온통 정부가 나서서 뭘 하겠다는 걸로 가득 찼다. 읽으면 읽을수록 오히려 기시감만 더해진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박근혜 정부만 해도 창조경제로 가자면서 ‘박정희 프레임’에서 한발짝도 나오지 못했다. 그런 정부를 비판하던 문재인 정부 역시 박정희 프레임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정부주도’ 환상에 빠져 있긴 마찬가지다. 기업가정신이 동력인 혁신성장을 정부가 주도할 수 있다면 소련 같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인들 왜 못 했겠나. 보수도 진보도 정권을 잡으면, 노동·자본 등 ‘생산요소 주도 성장’을 해온 박정희와 경쟁하려 드니 과거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급기야 ‘생태계’란 개념조차 한국에선 변질되고 말았다. 대통령은 “창업과 신산업 창출이 이어지는 혁신생태계를 조성하겠다”고 했다. 정부가 돈을 퍼부어 인위적으로 조성하는 생태계는 ‘관치 생태계’일 뿐, 기업가가 주도하는 지속가능한 혁신생태계일 수 없다. 정부가 창업붐, 벤처붐을 만들 순 있지만 그게 꺼질 땐 생태계도 통째로 날아간다. 그 골이 얼마나 깊은지, 우리가 이미 경험한 대로다.

어떤 면에선 노무현 정부 ‘혁신주도성장’보다 후퇴한 느낌이다. 기업가정신은 특정 기업군에 배타적 개념이 아님에도 ‘혁신성장=창업·중소벤처기업’인 양 편가르기 하는 게 그렇다. 규제개혁 의지도 분명치 않다. ‘규제 샌드박스’ 도입을 선물처럼 내놓지만 정부 심사를 거쳐야 하는 임시허가일 뿐이다. 다른 나라는 ‘규제개혁’보다 더 센 용어를 못 찾아 아쉬워하는데 문재인 정부 ‘규제 재설계’는 방향성을 종잡기 어렵다.

대통령은 “‘사람 중심 경제’는 일자리와 소득주도 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를 3대축으로 한다”고 했다. 만약 소득주도 성장이 강조하는 친노동정책과, 혁신성장이 요구하는 노동 유연성이 부딪치면 문재인 정부는 어느 쪽 손을 들어줄까. 공정경제를 내건 경쟁정책이 업종 간 칸막이로 따지는 독과점과, 진입장벽을 없애달라는 혁신성장이 부딪치면 그땐 또 어찌할까.

대통령은 애플, 구글, 아마존 같은 디지털 혁신기업도 언급했다. 문제는 이들 기업이 국내 기업환경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더 이상 혁신기업으로 대우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애플은 납품회사 이익을 쥐어짜는 ‘나쁜 기업’, 구글은 주기율표를 채우고도 모자랄 ‘문어발 기업’, 아마존은 유통·물류를 넘나드는 ‘약탈 기업’이 되고 만다. 거창한 청사진 따위는 필요 없다. 문재인 정부 혁신성장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이런 모순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렸다.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경영과학박사 ah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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