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실현 지체되고 승소자엔 이중부담
철저한 심리로 1심의 신뢰성 높여야
윤성근 <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재판받을 권리의 핵심은 ‘공정한 재판(fair trial)’에 있었다. 세계인권선언,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유럽인권협약 등 한국도 당사국이거나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인권 문서도 재판받을 권리를 이렇게 규정한다.
재판의 중점은 사실을 밝혀내는 데 있다. 재판의 결론은 확정된 사실에 법을 적용함으로써 도출되므로, 사실 확정이 독립변수이고 가장 중요하다. 편견이 개입하거나 오류가 발생하는 것도 대부분 사실 확정 과정의 문제다. 따라서 공정한 사실심 재판을 받을 권리가 당사자에게 가장 중요하고 직접적인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실 확정은 인간의 인식이나 기억, 보존된 각종 증거에 의존하지만 이런 자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흩어져 사라진다. 즉 재판을 반복한다고 더 정확한 사실이 밝혀지기는 어렵다. 이에 대부분 선진국에서 사실 확정을 위한 재판은 한 번으로 마친다. 즉 재판받을 권리의 핵심은 한 번의 사실심 재판에 관한 것이다. 항소는 당연히 보장되는 것이 아니며 재판받을 권리의 확보라는 관점에서 인정된다. 항소심은 사실심이 아니며 재판받을 권리의 침해 여부를 살피는 것이 주된 역할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항소심 역시 사실심이며 광범위한 항소가 허용되고 있다. 광복 당시 판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불가피했던 선택으로 보이지만 이런 광범위한 항소는 유례를 찾기 어렵다. 그 결과 패소한 당사자가 한 번에 승복하는 경우는 드물다. 1심 재판에 진지하게 임해 온갖 심력을 소모해가며 승소한 사람의 처지에서는 고통스러운 재판을 다시 겪어야 한다는 현실 앞에 좌절하고, 시간과 돈이 부족한 경우에는 억울한 일을 겪을 수도 있다. 패소한 사람은 1심 판결문을 참고 삼아 완전히 주장을 바꿔 새로 싸움을 시작하기도 한다. 이 경우 대개 변호사를 바꾼 뒤 1심 변호사가 오해해서 주장을 잘못했던 것이라고 말한다.
항소심에서 주장이 바뀌면 그 자체로는 아무 잘못도 없는 1심 재판이 부당하다고 취소되기도 한다. 1심 법관으로서는 황당한 일이다. 이때는 항소심이 사실상 1심이다. 이렇게 되면 1심 재판의 존재 가치가 위협받는다. 이 문제는 1심 강화로 나아가는 데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한계가 된다.
사실심을 두 번 하면 항소 이유는 대개 1심의 사실 인정을 다투는 데 집중된다. 항소심에서 사실 인정이 바뀐다면 사람들에게 법원은 진실을 발견할 책임이 있고 그들이 믿는 진실이 법원에서 확인돼야 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심어주게 된다. 법원이 국민에게 ‘진실을 밝혀주겠다’고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모습이다. 이것은 대법원에서까지 사실문제를 다투는 심리적 동기를 제공한다.
1심 재판의 파기율이 높아 믿기 어려우므로 사실심을 한 번에 끝내는 것은 불안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항소심에서 파기하는 이유의 대부분은 청구를 바꾸고 주장 입증을 바꿨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는 재판이라면 애초에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1심 재판에 부족함이 있다면 역량을 보충하고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일이지 1심을 통과의례처럼 취급하고 상급심에 다시 재판해달라고 할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재판은 신속하다는 점에서 세계적인 정평이 있다. 실제 1심 선고까지는 대단히 빠르다. 그러나 사건 전체를 놓고 분쟁을 종국하기까지의 수명을 고려하면 빠르다고 말하기 어렵다. 중재는 우리나라에서도 한 번에 끝난다. 중재판정에 대한 항소는 허용되지 않으며 특별히 심각한 흠이 있을 때에 한해 취소할 수 있다. 재판이라고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다. 사실심 재판을 두 번 거듭한다는 것은 우리 재판제도의 근본적 결함이다. 재판의 본질이나 재판받을 권리의 역사에 비춰 봐도 옳지 않다. 두 번의 사실심을 위해 법관이 이중배치되므로 인적·물적 자원의 낭비도 심하다. 정의의 실현도 그만큼 지체된다.
특히 승소한 당사자에게는 부당한 이중위험을 지워 막상 그의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한다. 1심 재판에 좀 더 시간을 투입해서 신중하고 철저하게 심리한 뒤 그것으로써 사실심리는 마치는 것이 사실 확정의 신뢰성 측면에서나 분쟁의 신속한 종결이라는 측면에서나 훨씬 바람직하다.
윤성근 <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