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넹 대신 넵!… '넵병' 만들어낸 인터프리터의 등장

입력 2017-11-03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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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 기자의 컬처 insight


[ 김희경 기자 ] “네” “넹” “넵”

직장인의 하루는 답으로 시작해 답으로 끝난다. 수많은 회사 카카오톡 단체방이나 개인 대화창에서 상사의 지시에 일일이 답을 하다 보면 하루가 흘러간다. 하지만 매번 “네”만 할 수도 없다. 딱딱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앞서 “네”를 잔뜩 말하면 반복하는 게 눈치도 보인다. 그래서 나온 대답이 “넹” “넵” 정도. 하지만 “넹”을 하면 장난스런 느낌이 난다. 그래서일까. 채팅방엔 “넵”이 쏟아진다. 이 짧은 답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다. 사소한 말 한마디까지 신경 써야 하고 때론 부당한 지시에도 꾹 참고 긍정적인 답변을 해야만 하는 삶의 고단함이다.

여기서 탄생한 신조어가 ‘넵병’이다. 넵병은 온라인·모바일에서 신드롬까지 일으키고 있다. ‘직장인들이 가장 많이 앓고 있는 병’이란 부제와 함께 단톡방 캡처 사진, 관련 콘텐츠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병’이란 한 글자가 붙었을 뿐인데 파편적으로 흐르던 작은 감정들이 엮어지고 이를 관통하는 용어가 만들어졌다. 신드롬이 일자 각 답변을 상황별로 분석하는 글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네?”의 속뜻은 ‘뭐라고?’, “넹”은 ‘일단 대답함. 일은 이따 할 거야’라는 해석도 있다. 문득 궁금해진다. 누가 이런 걸 만드는 걸까.

새로운 ‘인터프리터(interpreter·해석자)’들의 등장이다. 대중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캐치해 의미를 분석한 뒤 문화현상으로 만들어낸다. ‘넵병’ 등 ‘2017년 신조어’와 관련 콘텐츠 대부분이 해석자들의 손에서 탄생했다. 전문가처럼 높은 수준은 아니지만 파급력은 더 막강하다. 대중이 놀이를 하듯 퍼뜨리기 때문이다. ‘크리에이티브(creative)’ ‘콘텐츠(contents)’ ‘커넥트(connect)’를 두루 갖춘 ‘C세대’의 전형이라고 하면 무리일까.

지난해까지만 해도 신조어는 10대가 만들어낸 줄임말이 대부분이었다.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돼’란 뜻. 의견을 묻는 척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는 사람)’ ‘세젤예(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이)’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올해는 20~30대 직장인과 관련된 신조어가 대거 등장했다. ‘나일리지(실력은 없으면서 많은 나이를 내세워 대접받으려는 사람)’ ‘시상사(시어머니 같은 상사)’ ‘감정 쓰레기통(타인의 감정을 쓰레기 받듯 받아줘야 하는 사람)’ 등이다. 이런 행동을 보여주는 대화 캡처본과 코믹 영상도 퍼져 나가고 있다. 자조적 색채도 분명 강하다. 하지만 단어 하나 말했을 뿐인데 통쾌함을 느끼게 된다. 신조어가 대중의 감정을 담아내고 분출토록 돕는 커다란 그릇이 됐기 때문이다.

이 중심에 선 해석자는 마케팅업계에서 자주 언급되는 ‘인플루언서(influencer·영향력 있는 개인)’와는 차이가 있다. 인플루언서는 특정 콘텐츠나 제품을 블로그 등을 통해 입소문 내는 역할을 주로 한다. 이름까지 알려진 유명 인사가 대부분이다. 반면 인터프리터는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들은 입소문을 내기보다 그냥 자신의 해석을 표현한다. 초기 확산의 범위도 크지 않다. 지인들만 보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메신저에서 소소하게 공유할 뿐이다. 다만 대중의 감정을 감각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빠르고 널리 확산되는 것이다.

이들이 속한 C세대는 밀레니얼 세대, X세대처럼 10여 살 단위의 나이가 기준이 아니다. 창의적인 생각을 더해 콘텐츠로 만들고 확산시키는 걸 즐기면 누구나 해당된다. 그런데 유독 20~30대가 중심이 되는 건 대부분이 그 나이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10대는 일상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아직 서툴고, 40대 이상보단 20~30대의 아이디어가 아무래도 더 반짝인다.

조선시대 탈춤을 떠올려보자. 가면 뒤에 숨어 누군지 알 수는 없으나 대중과 호흡하며 통쾌함까지 선사했다. 해석자들과 닮았다. 탈춤은 엄격한 신분제에서도 유일하게 허락된 풍자극이었다고 한다. 백성들이 잠시나마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분노도 억울함도 분출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현대인의 고통이 그만큼이나 된다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현실이란 굴레에 갇혀 힘겨운 하루를 보내고 있다. 어쩌면 해석자들이 만든 신조어들은 이 시대를 버텨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작은 탈춤이 되고 있는 게 아닐까.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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