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달라’박성현(24)이 기어이 일을 냈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루키로는 역대 최초로 세계랭킹 1위에 오르는 ‘남다른’ 초대형 사고다. 세계랭킹을 매기는 제도가 2006년 도입된 만큼 450년 여자골프 역사의 일부에 관한 일이며, 이미 한국에서 10승을 올리고 간 ‘중고 루키’의 일이라고 의미를 제한한다 해도 그 가치가 달라질 수 없는 신기원이다.
세계랭킹 1위가 어떤 자리인가. 골프 인구가 대략 200개국 6000만명이다. 이 가운데 한국 미국 일본 유럽 중국 호주 등 주요 국가의 투어를 뛰는 프로가 어림잡아 수 천명이다. 여성 최초 프로 골퍼 헬렌 힉스(1911~1974)가 뉴스거리가 됐던 1930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된 요즘 여자 골프계다. 더구나 LPGA는 10년 이상을 골프 하나에 ‘다걸기’한 세계 각국 ‘골프 달인’들이 돈과 명예를 좇아 몰려드는 전장터로 하루가 다르게 변모 중이다. 이 중 단 한 명만이 누릴 수 있는 타이틀이 세계랭킹 1위다.
대단한 건 한국인들이다. 지금까지 세계랭킹 1위를 한 번이라도 해본 8개국 12명 중 한국(계) 출신이 5명이다. 신지애 박인비 유소연 박성현, 그리고 뉴질랜드 동포 리디아 고(고보경)가 이 좁은 문을 뚫어냈다. 비율로 42%니 거의 절반이다.
박성현의 여왕 등극이 좀더 각별한 이유는 또 있다. 그는 신동이나 천재소리를 듣지 못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골프채를 잡았지만 또래 애들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따낸 국가대표 타이틀도 오래가지 않았다. 투어 데뷔 해인 2014년엔 백규정, 고진영, 김민선 등 동갑내기 1995년생 ‘빅3’ 후배들에 가려 존재감이 없었다. 그해 10번이나 컷 탈락했다. “스스로 남들과 다르다고 믿으려 했고,달라지기 위해 노력했다”는 그는 하루 팔굽혀펴기 500개씩을 묵묵히 해내면서 ‘자신의 시대’를 하나하나 쌓아 올렸다. 그렇게 국내와 미국 투어에서 12승을 거둬들였다. 재능보다 목표의식과 성실로 꿈을 쟁취한 노력형 인간승리다.
LPGA는 그의 별명을 ‘닥공 골퍼(shut up and attack)’라 표현했다. 또박또박 치는 기존 코리안 챔피언들과 달리 화려한 공격골프로 아시안 골프의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LPGA 시장을 들썩이게 한다는 뜻을 담은 평가다. 갈수록 비거리 전쟁터로 변모하고 있는 국제무대에서도 통할 ‘기술 자산’을 장착했다는 것도 특별하다.
그의 비상은 그러나 아직 시작에 불과해 보인다. 보여줄 것이 더 많다는 기대감이 벌써부터 부풀어 오르는 분위기다. 신인왕,상금왕,올해의 선수,최저평균타수상을 싹쓸이 하는 4관왕, 절대강자 등극이다. 현실화될 경우 그는 39년 전인 1978년 루키로 4관왕에 오른 낸시 로페즈에 비견될 살아있는 전설이 될 수도 있다. 로페즈는 데뷔 첫해 9승을 차지한 절대강자였다.
신인왕은 확정됐다. 상금왕도 유리한 고지에 다가가 있다. 216만1005달러를 벌어들인 현재 랭킹 1위 박성현과 2위 유소연(196만4천425달러)의 격차는 19만6580달러다. 남은 대회는 블루베이LPGA와 CME글로브 투어 챔피언십 등 2개다. 2위에 올라 있는 올해의 선수상과 최저타수상도 남은 2개 대회에서 얼마든지 뒤집기가 가능한 범위내에 있다. 유소연이 현재 올해의 선수상 포인트 162점으로 선두를 달리고 있고, 박성현이 148점이다. 최저타수 1위인 렉시 톰슨(미국)과의 격차도 0.22타 정도다. 남은 대회에서 1승만 추가해도 상황은 한꺼번에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유소연과 렉시 톰슨은 8일 중국에서 개막하는 블루베이 대회에 출전하지 않는다. 박성현으로서는 격차를 벌릴 호기다.
그러나 장미빛만 있는 게 아니다. 세계랭킹 1위에 오르는 것만큼이나 지키는 게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로레나 오초아(158주),청야니 (109주)리디아 고(104주) 처럼 100주 넘게 왕좌를 지킨 ‘장수 여제’들이 없지 않다. 하지만 1~2주만에 타이틀을 내준 경우도 있다. 2010년 6월 처음 세계랭킹 1위에 오른 미야자토 아이(일본)는 1주일만에 왕좌를 크리스티 커(미국)에 내줬다. 지난 6월 에리야 쭈타누깐(태국)은 딱 2주 동안 왕좌를 지켰고, 지금은 긴 부진의 터널에 빠져 있다. 1인자 자리를 1년 이상 차지했던 선수 5명 역시 이미 은퇴를 했거나 부진을 겪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세계랭킹 1위라는 타이틀이 ‘지속가능한 골프’를 꿈꾸는 박성현에게 되레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꽤 많은 전문가들은 말한다. 장타를 위해 상하체 분리가 극대화된 지금의 스윙이 부담될 때가 있을 거라는 지적이다. 한 스포츠의학 박사는 “타이거 우즈도 사용빈도가 가장 높은 허리에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면서 결국 부진의 늪에 빠졌다”며 “타이틀이나 기록에 연연하지 말고 길고 멀리 보는 게 필요하다”고 우려했다.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다”는 박성현의 세계랭킹 1위 소감은 그래서 다행스럽다. ‘호시우행(虎視牛行)’의 여유가 그에겐 가장 절실한 과제일지도 모른다. 진짜 박성현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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