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왔나 싶더니, 어느새 조석으로 귓불을 에는 찬바람이 초겨울이 가까웠음을 느끼게 한다. 24절기 중 남은 것은 눈이 온다는 소설과 대설, 그리고 밤이 가장 긴 때인 동지뿐이다. 이즈음, 어린 시절 고향에선 집마다 겨울 준비로 분주했다. 초가지붕에 새 이엉을 얹고, 겨우내 쓸 땔감을 모으고 날랐다. 동네 이웃 아주머니들은 배추와 무를 소금에 절여, 김치를 담그는 김장으로 바빴다. 우리 고향 김장김치는 마늘과 생강, 파, 고춧가루 등 갖은 양념과 멸치젓갈이 어우러져 깊은 맛을 냈다.
김장 풍습은 한민족의 유구한 문화유산 중 하나다. 유네스코는 2013년 우리의 김장과 김치 문화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채소를 소금이나 식초에 절인 피클을 즐기는 서양 친구들도 김치 맛을 알고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필자는 김장의 유구한 전통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의 힘으로 이어져 왔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다.
김장은 보통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 집집이 ‘품’을 주고받으며 한다. 겨울을 나고, 봄동을 만나는 이듬해 봄까지 반 년의 먹거리를 장만하는 일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김장하는 날은 또한 마을공동체를 화합과 소통으로 이끄는 시간이었다. 김치의 주재료인 배추와 무, 고추, 마늘, 생강, 파, 젓갈도 이웃의 도움 없이는 얻기 힘들었다. 가가호호 김장을 준비하며, 자연스럽게 이웃과 재료를 주고받았고, 김장 날 한데 모여 김치를 담갔다. 김장을 마친 뒤 김장김치에 삶은 돼지고기를 곁들여 먹던 풍습은 보쌈으로까지 발전했다.
세종특별자치시 시민이 된 후, 요즘 맛보는 김장김치는 고향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젓갈과 양념을 적게 쓴, 이 지역 김치는 담백하고 덜 짜다. 김칫소에는 인근 충남 공주에서 많이 나는 밤이 들어가, 씹을수록 느껴지는 고소함도 별미다.
김장의 철학은 인사와도 통한다. 맛난 김장김치를 위해 좋은 재료와 양념을 고르고 골라서 적절하게 잘 섞어야 하는 것처럼 나라의 인재도 널리 두루 고르게 선발해야 한다. 양성평등은 물론 장애인, 지역 인재 등에 대한 배려를 통해 공직의 다양성을 이뤄야 한다.
맛있는 김장의 비결이 정성과 숙성이듯, 조직관리자는 선발된 인재에게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지원해 이들이 전문성과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 숙성된 김치가 오묘한 맛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선사하듯, 잘 선발되고 육성된 공직자가 국민에게 희망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는다. 우리 고유의 음식 중 하나인 김치가 음식 이상의 철학과 문화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경이롭게 느껴지는 날이다.
김판석 < 인사혁신처장 mpmpsk@korea.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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