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경비구역(JSA)이 있는 판문점(板門店)의 원래 지명은 ‘널문리’다.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신하던 선조가 강을 건너려다 다리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자, 마을 사람들이 대문짝 등 판자(널)로 임시 다리를 놓아 건너게 한 뒤 그렇게 불렸다.
이 한적한 마을은 360년 뒤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장소로 변했다. 6·25 전쟁의 휴전회담 장소로 중립적인 위치를 물색하던 유엔 측이 이곳을 회담장으로 제안했다. 이후 휴전회담은 이곳의 작은 주막집인 ‘널문리가게’ 앞의 콩밭 천막에서 진행됐다. 이때 ‘널문리가게’를 한자로 표기한 ‘판문점’이 공식 지명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 서쪽의 작은 강 사천(砂川·모래내)에 널문다리가 있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후 이 다리를 통해 포로 송환이 이뤄졌다. 당시 포로들이 한 번 다리를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뜻에서 ‘돌아오지 않는 다리’라는 이름이 생겼다. 1968년 북한에 납치됐던 미국 푸에블로호 선원들도 이 다리로 귀환했다.
이 다리 한가운데에서 남북 경계가 나뉜다. 1976년 8월 이전까지는 공동경비구역 내의 남북 통행이 가능했다. 북측이 판문점으로 이동하는 유일한 교량이었다. 그러다 북한군의 ‘도끼 만행 사건’이 발생했다. 유엔 측은 공동경비구역 내에도 군사분계선을 긋고 통행을 차단했다.
다리가 폐쇄되자 북한군은 크게 당황했다. 당장 군 보급로부터 끊겼으니 비상사태였다. 그래서 기존 다리보다 조금 위쪽에 새 교량을 부랴부랴 건설했다. 얼마나 급했는지 72시간 만에 콘크리트 다리를 완공했다. 그렇게 해서 붙은 이름이 ‘72시간 다리’다.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이들 다리는 자유세계로 향하는 탈출로이기도 했다. 1959년 옛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평양지국 기자 이동준을 비롯해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모티브가 된 변용관 상위(대위) 등이 이곳을 통해 넘어왔다. 1980년대엔 공산권 국가의 중립국감독위원회와 북측 정전위원회 소속 군인들이 잇달아 망명했다.
지난 13일 목숨을 걸고 탈출한 북한 병사는 여덟 번째 사례다. 그는 이날 오후 시속 70~80㎞로 ‘72시간 다리’를 건넜고, 등 뒤로 40여 발의 총격을 받으며 사선을 넘었다. 그가 지프차 전조등을 켜고 ‘72시간 다리’를 건너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7초였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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