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20년째 말뿐인 규제 네거티브화

입력 2017-11-30 17:52   수정 2018-03-19 11:39

"정권마다 개혁해도 '안돼 공화국'
군림·순응 역사, '큰 정부'선 한계
중국·일본도 변신… 법·관습 다 바꿔야"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4차 산업혁명 시대엔 기존 사업자와 스타트업 간 경쟁이 불가피하다. 누가 시대 변화와 소비자 니즈를 충족할지는 시장이 판단한다. 공무원이 관행과 규정을 앞세워 기존 사업자를 보호해선 안 된다.”(리커창 중국 총리) “법이 없으면 하면 되는데 오히려 못 하게 한다. 민간의 상상력을 낡은 규제와 관행이 발목 잡아서는 안 된다.”(문재인 대통령)

문제의식은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다. 세계 200여 개 ‘유니콘’(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 스타트업) 가운데 중국이 58개다. 미국(108개) 다음이다. 한국은 달랑 2개(쿠팡, 옐로모바일)다. 어떤 신기술·신산업도 규제와의 혈전을 피할 길이 없다. 규제유연성 세계 95위인 ‘안 돼 공화국’의 현주소다.

역대 정부마다 ‘네거티브 규제 혁신’을 외쳤다. 법에 나열된 것만 가능한 ‘포지티브 규제’ 대신, 금지된 것 외엔 모두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이번 정부도 ‘규제 샌드박스’와 ‘사전 허용, 사후 규제’의 네거티브 전환을 약속했다. 하지만 지난 20년간 말뿐이었듯,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기엔 근본적 한계요인이 있다.

우선 법·제도부터 네거티브 전환이 힘든 열거식이다. 법에 근거가 없으면 그냥 ‘불가’로 해석한다. 미국은 유턴금지 표지판이 없으면 어디든 유턴이 가능하지만, 한국에선 유턴 표지판이 있는 곳만 용인되는 것과 같다. 특별법을 만들고 법률 몇 개 고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둘째,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도가 일천하다. 재산권 보호, 계약이행 보장, 거래비용 최소화 등 기본 전제조차 ‘공익’이란 명분 아래 종종 무시된다. 혹여 규제를 풀어 누군가 대박나면 특혜 시비가 나오고, 기득권과의 마찰은 곧 ‘생존권 투쟁’으로 번진다. 헌법에는 국가개입과 기본권 제한 조항이 너무 많다. 최근 개헌 논의도 권력체제에만 쏠렸을 뿐, 국가권력 제한에는 아무도 관심을 안 둔다.

셋째, ‘군림과 순응’의 오랜 역사도 뺄 수 없다. 관존민비·사농공상 질서 아래 국가는 군림했고, 관리는 착취했다. 현대에 와서도 ‘큰 정부’에 익숙해 여론은 늘 “정부는 뭐 하냐”고 질타한다. 자유주의나 ‘작은 정부’는 제대로 해본 적도 없다. 길거리 안내문조차 강권과 금지 일색 아닌가.

규제는 다 존재이유가 있고, 임자도 있다. 새로운 것을 기피하는 전례답습과 경로의존성이 강한 게 관료행정이다. 눈치 빠른 관료들은 소득주도 성장과 혁신성장의 부정합성과, 어디에 방점이 찍혔는지도 본능적으로 안다. 이런 현실은 규제의 모범이라는 영미권과 간극이 너무 크다.

프랑스 역사학자 앙드레 모루아는 미국 역사를 드센 주민들의 권한을 국가가 조금씩 회수해오는 과정으로 봤다. 영국도 대헌장(1215) 이후 800년간 국민이 왕으로부터 권리를 쟁취한 역사다. 개인의 권리를 우선하는 영미 전통은 국가권력을 제한하고, 선험적 이성보다 경험에 의한 지식축적을 중시하는 쪽으로 진화했다. 데이비드 흄, 애덤 스미스 등 스코틀랜드 계몽주의가 바탕이다. 국가를 사회계약에 의한 인위적 질서로 보는 대륙의 계몽주의와는 확연히 다르다.

네거티브 규제 혁신은 사회 전체의 제도와 관습의 대(大)개조 없이는 공염불이다. 신제도학파 선구자로 노벨경제학상(1993)을 받은 더글러스 노스는 국가의 번영을 좌우하는 제도는 공식제도(법)뿐 아니라 관습, 규범, 문화 등 비공식제도가 중요하다고 봤다. 네거티브화도 비공식 제도의 쇄신이 뒷받침돼야만 가능하다.

규제혁신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다. 중국과 일본도 확 달라지고 있다. 중국은 스타트업이 나오면 기다리고 지켜보는 인내전략(wait and see)에선 외려 미국보다 낫다는 평이다. 일본도 ‘초스마트화 전략’으로 로봇은 세계 최고다. 아시아 최고부자가 된 중국 텐센트의 마화텅 CEO는 “오늘 떠오른 아이디어를 오늘 밤 안에 바로 못 만들면 내일은 100곳의 경쟁자와 맞닥뜨리게 된다”고 했다. 규제는 신기술도 금방 ‘쉰 기술’로 만든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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