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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시점에서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분야 중 하나는 인문학이다. 특정 기술이 사회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이런 기술을 수용할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윤리적 기반이 함께 조성돼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1990년대 전 세계적으로 게놈 프로젝트가 본격 가동될 무렵 유전체에 대한 공학적 연구와 더불어 그런 기술이 가져올 윤리적, 법적, 사회적 영향에 대한 연구가 다양하게 병행됐다. 당시 이런 사회적 추세를 ELSI(ethics, legal, social issues 또는 ethical, legal, societal implications)라 지칭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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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기술 외부의 환경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기술 그 자체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자율주행차의 핵심 기술은 판단능력이다. 이때 판단능력은 윤리적인 영역도 포함된다. 윤리학은 주행 중 마주칠 다양한 돌출 상황에서 어디에 우선순위를 둬야 할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판단 기준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자율주행차의 알고리즘이 자신과 타인의 생명에 같은 우선순위를 부여할지, 자신의 생명에 더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할지에 따라 차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급격히 핸들을 꺾어 주변 자동차를 사고 위험에 노출시킬 수도 있으며 반대로 타인에게 피해를 덜 주는 대신 차주가 더 큰 상해를 입도록 운전할 수도 있다.
인문학의 도움이 필요한 신기술은 자율주행자동차만은 아닐 것이다. 최근 언급되는 신기술들은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인문적 자양분 없이는 기술개발 그 자체도 완료하기 힘든 상황이다. 많은 선진국들이 기술개발이 완료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기술과 관련된 윤리적, 제도적, 법리적 논의와 검토를 서두르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박종호 < KDI 전문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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