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원전 정부'에 밉보였나…에너지 공기업 사장들 줄줄이 '퇴장'
에너지 공기업 사장들 줄사표
산업부 담당 공무원 전원 교체
조환익 사장 사퇴에 한전 '당혹'
승진인사 기대하던 한전…사장 사퇴에 뒤숭숭
검찰, 본사·사장 자택 압수수색에 한수원 '패닉'
산업부 공무원 "에너지 라인 초토화 우려"
[ 주용석/이태훈 기자 ] 한국이 중국의 추격을 뿌리치고 21조원 규모의 영국 무어사이드 원자력발전소 사업권을 따냈지만 정작 국내 원전업계의 표정은 밝지 않다. 정부의 탈(脫)원전 기조 탓에 한국이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에 처음 원전 수출을 이뤄냈을 때 같은 들뜬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원전을 비롯한 에너지공기업 사장들은 줄줄이 물러나는 분위기다. 산업통상자원부의 에너지담당 고위 공무원은 현 정부 출범 후 전원 교체됐다.
영국 원전 수주전을 이끈 한국전력만 해도 조환익 사장이 임기(내년 3월)를 남겨두고 돌연 사의를 밝혔다는 소식에 뒤숭숭한 분위기다. 한전은 매년 12월 초 정기 인사를 해왔다. 올해도 실무 준비까지 마쳤다. 영국 원전 수주전에서 승리하면서 대규모 승진 인사에 대한 직원들의 기대가 컸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조 사장이 물러난다는 얘기가 나오자 직원들은 “당혹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국수력원자력은 ‘패닉’ 상태다. 검찰이 지난 4일 이관섭 한수원 사장 자택과 경북 경주에 있는 한수원 본사를 압수수색했기 때문이다. 수사 배경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난해 정하황 전 서부발전 사장 인선 과정이 영향을 미친 것 아니냐는 의혹이 검찰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업계에선 ‘이 사장이 청와대 눈 밖에 난 것 아니냐’는 얘기가 조심스레 나온다. 이 사장은 지난 7~10월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과정에서 정부의 탈원전 정책과 거리를 뒀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에너지공기업 수장들은 줄줄이 교체되고 있다. 9월에만도 한국남동발전을 비롯한 한전 발전자회사 네 곳 사장이 일괄 사표를 냈다. 이번에 이 사장이 물러나면 에너지공기업 사장 전원이 물갈이되는 셈이다.
김용진 한국동서발전 사장이 지난 6월 기획재정부 2차관으로 옮겨가고 한 달 뒤 이승훈 한국가스공사 사장이 물러날 때만 해도 에너지 공기업에 대규모 ‘인사 태풍’이 불어닥칠지는 불확실해 보였다. 공공기관장 임기는 법에 보장돼 있고 문재인 정부는 출범 초 기관장들로부터 일괄사표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9월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취임 후 공공기관장과의 간담회를 열고 국정 철학을 공유했다. 이를 통해 같이 갈 수 있는 분들은 같이 갈 것”이라고 밝히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공기업 사장들은 ‘전 정부에서 임명된 사장들은 나가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이후 한국전력기술과 한국남동발전·서부발전·남부발전·중부발전 등 한전 자회사 사장들이 일괄 사표를 냈다. 10월에는 김정래 한국석유공사 사장이 물러났다. 모두 임기를 마치기 전이었다. 에너지 공기업 사장 자리는 텅 비다시피 했다. 이관섭 한수원 사장까지 물러나면 박근혜 정부에서 임명된 에너지 공기업 사장은 한 명도 남지 않게 된다.
산업부 에너지 라인 전원 물갈이
산업부 ‘에너지 라인’도 전원 교체됐다. 에너지 정책을 총괄했던 우태희 2차관과 김학도 에너지자원실장(1급)이 각각 지난 7월과 9월 자리에서 물러났다.
에너지산업정책관, 에너지자원정책관, 원전산업정책관, 에너지산업정책단장 등 에너지자원실 산하 4개 국장급 자리도 전부 바뀌었다. 정권이 바뀌면 관료들의 퇴진이나 자리 바뀜이 흔하긴 하지만 산업부에선 “기존 에너지 라인이 100% 초토화된 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란 반응이 나온다.
정부가 탈원전 기조에 따라 원전 비중을 축소하고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을 펴면서 원전 친화적인 사고를 가진 기존 에너지 라인을 물갈이했다는 게 관가의 분석이다.
산업부 한 서기관은 “공무원에게 영혼을 가지라고 하지만 어느 누가 이런 인사를 보고 소신 있게 정책을 펼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영국 원전 수주했지만…
한국이 영국에서 원전 사업권을 따냈지만 원전 부품업체들의 걱정도 여전하다. 이번 사업은 영국 무어사이드 지역에 총 3.8GW 규모의 원전을 짓는 사업이다. 한전이 원전 건설과 운영을 맡는 게 확정되면 한국형 APR1400 원전이 채택될 가능성이 높고 국내 부품업체들도 수혜가 예상된다.
하지만 당장 사업이 시작되는 건 아니다. 일단 한전이 영국과 협상을 거쳐야 한다. 조환익 한전 사장도 7일 한국경제신문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제 막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을 뿐”이라며 “파이낸싱(자금조달)부터 전력 판매 계약까지 협상이 험난하다”고 말했다. 가능성은 낮지만 만에 하나 최종 계약이 안 될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는 의미다.
게다가 설계 기간 등을 감안하면 무어사이드 원전 건설을 시작하는 시기는 4~5년 뒤가 될 전망이다. 이 기간 정부는 공론화 결과 건설 재개가 결정된 신고리 5·6호기 외에는 신규 원전을 짓지 않는다. 당초 신한울 3·4호기, 천지 1·2호기와 아직 이름을 정하지 않은 원전 2기 등 총 6기의 원전을 더 지을 예정이었지만 정부 방침에 따라 백지화됐다.
단기간에 해외에서 또 원전을 수주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원전 부품업체들은 두산중공업처럼 대기업도 있지만 중소기업도 많다. 이들은 일감이 없으면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원전 부품업체 고위 관계자는 “미국이나 영국이 직접 원전을 짓지 못하는 이유는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공급망이 붕괴했기 때문”이라며 “한국도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이 없다”고 말했다.
주용석/이태훈 기자 hoho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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