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의 논점과 관점] 처음 들어본 국세청장의 사과

입력 2017-12-12 17:47  

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


요즘은 드물지만 과거에는 심심하면 한 번씩 기업 세무조사 기사가 신문에 대서특필되곤 했다. 세무조사는 세금 추징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게 당연시됐기 때문이었다. 정권 차원에서 특정 기업이나 업종을 ‘손볼 때’는 세무조사로 시작해 검찰 수사로 이어지는 게 통상적인 코스였다. 탈세 자체보다는 어떤 이유로 정권에 밉보였는지, 처벌은 어느 정도일지 등이 세간의 관심사였다.

보수 정권서만 세무조사 남용?

재미있는 건 이런 세무조사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 국세청 반응이 늘 똑같았다는 점이다. “정기 세무조사일 뿐이다.” “그 어떤 정치적 의도나 배경은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뭐 이런 식이었다. 정권이 여러 번 바뀌고 조사 대상 기업이 달라져도 국세청 답변은 변함이 없었다. 새 정부에서 국세청장이 된 한승희 청장은 지난 6월 인사청문회에서, 그리고 지난 10월 국정감사에서 “국세청은 법과 원칙에 따라 세무조사를 벌인다”고 말했다. 국세청의 오래된 ‘모범 답안’을 그대로 반복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난달 이런 전통(?)을 깼다. 취임 후 처음 열린 국세행정개혁위원회에서 “과거 세무조사 과정에서 국세청의 중립성과 공정성이 훼손된 정황이 있다”며 고개 숙여 사과했다. “2008년 태광실업 세무조사를 비롯해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행해진 다섯 건의 세무조사에서 조사권 남용이 의심되는 정황을 확인했다”는 국세행정개혁TF(이하 국세TF) 발표를 인정한 것이다.

세상 사람이 다 알고 있었지만 국세청만은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는, ‘정치적 이유’에 의한 세무조사 존재를 현직 국세청장이 처음 시인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국세TF는 지난달 20일 “노무현 전 대통령 후원자였던 박연차 회장의 태광실업과 촛불시위 가담 연예인 소속 기획사에 대한 세무조사는 조사권 남용 문제가 있다”고 밝혔다. 1997년 이후 62건의 세무조사를 점검해 보니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고 유독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세무조사만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국세TF는 국세청의 적폐청산 기구다. 단장인 강병구 인하대 교수는 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장 출신이고, 현직 경실련 부의장과 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 부소장도 멤버다. 국세TF는 당초 보수 정권 때의 세무조사만 점검하려 했다고 한다. 그런데 국세청 내부에서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며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 언론사 세무조사 등도 포함시키자는 의견을 내자 격론 끝에 모두 포함시키기로 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다. 세무조사에 관한 한, 정치적 입김을 철저히 배격해오던 국세청이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만 돌변했다는 게 이들 주장이다.

부동산 조사 역시 '적폐' 될 수도

누가 이 말을 믿겠나. 국세청 직원들부터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국세청을 동원한 정권 차원의 ‘손보기’는 과거로 갈수록 더 심했다는 건 누구나 알 만한 얘기다. 그런데도 한 청장은 마치 ‘자아 비판’이라도 하듯, 국세청이 보수 정권 아래서 ‘부역자’ 노릇을 했다고 시인했다. 그도 괴로울 것이다. 국세청으로선 결코 인정하기 싫었던 ‘치부’를 드러낸 데다 묵묵히 일해온 직원들을 결과적으로 욕되게 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서슬 퍼런 권력으로부터 어떻게든 조직을 보호해 보려는 수장으로서 고육책이었을 수도 있다.

국세청은 최근 부동산 투기 세무조사를 벌여 261명으로부터 581억원을 추징했다고 발표했다. 후일 이 조사는 어떤 평가를 받을까. 부동산 투기를 잡겠다는 정부 정책 수단으로 세무조사가 동원된, ‘조사권 남용’ 사례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있을까.

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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