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성미 기자 ] “오랫동안 서울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파리는 정적이고 변하지 않는 도시지만 서울은 오래된 이야기와 새로운 이야기가 공존하는 공간입니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놀라운 도시예요.”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 작가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가 서울을 배경으로 한 소설 《빛나-서울 하늘 아래》(서울셀렉션)를 내놨다. 제주 해녀 이야기를 담은 소설집 《폭풍우》에 이어 한국을 소재로 삼은 두 번째 작품이다.
14일 서울 한국출판문화회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르 클레지오는 신작에 대해 “전라도 어촌 출신 대학생인 빛나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 뒤 우연히 만난 병든 여인 살로메에게 서울에서 일어나는 일화를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빛나가 전하는 이야기는 투병 중인 여인에게 기쁨과 즐거움,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힘을 선사한다.
빛나의 입을 통해 르 클레지오가 얘기하는 ‘서울 이야기’는 다양하다. 첫 번째는 이북 고향을 그리워하며 비둘기를 키우는 한 남자 이야기다. 르 클레지오는 “38선을 넘어온 한 여인이 비둘기 한 쌍을 데려왔는데, 그 비둘기들이 고향 나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고 비둘기를 키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비둘기가 고향에 당도한다는 소박한 이상이 실현될 수 있다면 감동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르 클레지오는 한국의 종교, 역사, 세대갈등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절망에 빠져 자살 직전까지 간 이웃을 구하는 한국 사람 특유의 ‘정(情)’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탐욕스러운 이들의 희생양이 되는 아이돌 가수도 그린다. 정체 모를 스토커 때문에 빛나가 느끼는 공포를 묘사하기도 한다. 다섯 편의 이야기는 얼핏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작가는 ‘그 절망과 좌절이 있어 생이 빛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죽음을 앞두고 이야기에 목말라하는 살로메의 모습에서 독자들은 역설적으로 생명의 소중함을 읽게 된다. 간담회에 동석한 송기정 번역가(이화여대 불문과 교수)는 “르 클레지오의 다른 작품들처럼 이 작품 역시 슬픈 분위기를 띠지만 슬픔을 결코 무겁지 않고 오히려 시적인 문체로 표현했다”고 말했다.
르 클레지오는 2007년 이화여대 초빙교수로 재직하며 1년간 집필과 강연 활동을 했다. 제주 명예도민증을 받는 등 한국과 각별한 인연을 맺어 대표적인 ‘지한파’ 작가로 꼽힌다. 그는 “서울은 최선과 최악이 공존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기술 발달로 인한 인간성이 상실되고 있는 것을 ‘최악’으로 분류한다면, 번화가 뒤에 숨은 좁은 뒷골목과 산자락에 자리한 작은 카페, 끈끈한 유대 관계를 ‘최선’이라고 불렀다. “그렇다고 서울을 마냥 목가적이나 이상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건 아닙니다.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따라다니는 스토커는 제가 제자에게 직접 들은 얘기입니다. 거대한 도시에서 느낄 수 있는 공포감이나 무력감도 동시에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신촌과 이대입구의 골목길, 서래마을, 오류동, 경복궁, 청계천, 여의도…. 책에는 서울의 다양한 지명이 등장한다. 모두 작가가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해 가 본 곳들이다.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덕분이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말은 ‘빛나’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속담도 좋아한다. 그는 “결코 살기 쉽지 않은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빛을 내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제가 좋아하는 단어 ‘빛나’를 주인공의 이름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르 클레지오는 한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또 쓰고 싶다고 했다.
“새벽 6시에 신촌에서 길을 나서면 전날 저녁 파티를 끝낸 젊은이들과 함께 허리가 굽은 노인들이 나타나 박스를 모으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그들을 따라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모든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습니다. 조그마한 나무로 된 집에서 미래를 점치는 점쟁이 얘기도 흥미로운 소재예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이야기꾼이죠. 서울의 택시 운전기사 이야기도 다뤄 보고 싶습니다.”
심성미 기자 smsh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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