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코메티 조각처럼 "그래도 걸어야 한다"
황주리 < 화가 >
20세기를 대표하는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전시를 보는 순간, 내내 가슴이 벅차올랐다. 낯익은 그의 작품 외에도 오래전에 쓴 그의 어록이 새롭게 와 닿았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철학을 형상으로 창조해낸 것 같은 자코메티의 가늘고 긴 사람의 초상은 개인적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한 영화나 수용소 사진 속에서 본 뼈만 남은 유태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실제로 20세기에 일어난 두 번의 세계전쟁은 예민한 예술가의 영혼에 고독한 상처의 지평을 무한대로 넓혀줬을 것이다.
늙음과 죽음이라는 숙명을 타고난 인간의 근원적 슬픔을 온몸과 마음으로 느끼게 하는 자코메티 조각의 힘은 훌륭한 장인을 넘어서는 위대한 철학가가 그 안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살았던 20세기의 절망을 그토록 극명하게 표현한 예술가는 드물다. 그는 매일 전진한다는 느낌에 사로잡히고자 했다. “나는 계속한다. 그것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것이 더 멀어진다는 걸 알면서.”
그가 남긴 어록은 조각 작품을 넘어서는 인간 본질의 실재와 환영에 관한 사색이기도 하다. “만일 내가 카페테라스에 앉아 반대편에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쳐다본다면, 나는 그들을 매우 작게 볼 것이다. 그들의 실제 크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이것은 사랑에 빠질 때와도 비슷한 존재의 원근법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상대의 객관적인 본질을 왜곡시켜 자신만의 시각으로 상대를 바라보게 된다.
자코메티 작품이 이전의 조각 작품과 전적으로 다른 것은 그 실물 크기에 관한, 실재와 무(無) 사이의 변증법이다. “인간이 걸어 다닐 때면 자신의 몸무게 존재를 잊어버리고 가볍게 걷는다. 거리의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무게가 없다. 내가 보여주려는 건 바로 그 가벼움이다.” 말하자면 그의 작품은 인간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보여주면서, 반대로 참을 수 없는 인간 상황의 무거움을 암시한다.
그가 20세기를 상징하는 주요한 조각품을 만들어낸 공간은 뜻밖에도 7평 남짓한 작고 열악한 작업실이었다 한다. “우습게도 내가 처음 이 작업실을 가졌을 때 난 이곳이 매우 작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래 있을수록 이곳은 점점 커졌다. 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곳에 넣을 수 있다.” 자신의 작은 작업실에 관한 노트는 자코메티의 실제 크기에 관한 사색을 떠올리게 한다.
시간과 공간은 작가의 상상에 따라 줄어들고 늘어나는 유동적인 개념이다. 그는 값비싼 집을 소유하기보다는 호텔에서 살고 카페처럼 잠깐 들르는 장소에 머무는 걸 더 좋아했다. 영원할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이 전쟁으로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걸 목격한 예민한 예술가의 당연한 생각일지 모른다. 전시를 보면서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의 연극 무대미술을 자코메티가 맡았다는 걸 알게 됐을 때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가 만들어낸 형상이 바로 고도를 기다리는 현대인의 초상이었으니까. “마침내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한 발을 내디뎌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는 걷는다. 걸어야만 한다.” 마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좀머씨 이야기》를 생각나게 하는 자코메티의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21세기가 왔어도 전쟁은 사라지지 않았고, 인류는 기상이변의 위기에 매 순간 위태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코메티의 조각품처럼 오늘도 걷는다. 고로 존재한다.
황주리 < 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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