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식 논설위원 yshong@hankyung.com
“재물은 우물과 같다. 쓸수록 자꾸 가득 차고, 이용하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 지금 나라 안에는 비단을 입지 않으므로 비단 짜는 사람이 없다. 따라서 여공(女工)이 쇠했으며, 장인이 없어졌다. 이용할 줄 모르니 생산할 줄 모르고, 결국 모두가 가난해져 서로 도울 길이 없다.”
조선 실학자 박제가(1750~1815)의 《북학의(北學議)》는 네 차례에 걸쳐 청나라의 풍속과 제도를 살펴본 뒤 쓴 책이다. 조선의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꿈꾸며 개혁과 개방 청사진을 담았다. 성리학이 나라의 사상적 근간이던 시절 그는 상업과 유통, 대외무역의 중요성 등 경제 논리를 강조했다.
제대로 된 경제 구조를 갖추지 못해 가난할 수밖에 없는 조선의 현실을 비판했다. 발상을 바꾸자는 것이었다. 소비를 진작하고 생산을 증진해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자고 주장했다. 그는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도덕이 무엇이 중요한가”라고 의문을 제기한 뒤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나라를 강성하게 하는 것을 학자가 추구해야 할 목표로 제시했다. 일종의 ‘조선판 국부론(國富論)’이다.
서문에서 조선의 현실을 냉정하게 진단했다. 그는 “지금 나라의 큰 병폐는 가난”이라며 “대궐의 큰 뜰에서 의식을 거행할 때 거적때기를 깔고 있다. 궁문을 지키는 수비병마저 새끼줄로 띠를 만들어 매고 있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가난을 구하기 위한 방법으로 외국과의 통상을 활성화할 것을 제안했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를 제외한 다른 나라와는 쇄국에 가까울 정도로 교역이 미미했다. 청나라와도 해로를 통한 교역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육로도 교역 물품 제한이 많아 ‘봇짐장사’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진단이었다.
"수레 이용해 유통경제 활성화해야"
조선 조정에 전면적인 문호 개방을 촉구했다. 그는 “가지고 있는 것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서로 교역하는 것은 천하 어디서나 통하는 정당한 방법”이라며 “교역하고 판매하는 일을 모두 허가해야 한다”고 했다.
유통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수레를 만들어 적극 이용할 것을 권장했다. 당시 상품 유통은 주로 보부상의 봇짐을 통해 이뤄졌다. 도로가 수레가 다니기에는 좁았고, 험준한 고갯길이 많았기 때문이다. 박제가는 “청나라 지형은 조선 못지 않게 험한 산이 많음에도 수레를 잘 만들어 대량의 상품이 가지 않는 곳이 없다”며 “조선엔 수레가 없으니 집값은 물론 나막신값, 짚신값도 오르게 된다. 도로를 보수해 수레 활용도를 높여 막힌 곳을 통하게 하면 소비와 생산이 늘어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분업이 국부의 원동력이라며 벽돌을 예로 들었다. 그는 “굽는 가마도, 때우는 회(灰)도, 수레도 내가 마련해야 하고, 장인의 일도 내가 해야 한다. 이렇게 혼자 벽돌을 만든다 해도 과연 얼마나 이익이 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민생에 날마다 소용되는 물건은 서로 나눠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윤의 중요성도 설파했다. 그는 “나라에서 값어치를 제대로 쳐주지 않으니 조선의 도자기가 중국 도자기보다 정교하지 않다”며 “힘을 다해 만들어도 값을 크게 깎는다면 장인들은 기술 배운 것을 후회하고, 상인들도 물건 파는 것을 꺼릴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윤이 충분치 않다면 상인의 활동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정확히 인식한 것이다.
"사대부 놀고먹는 돈 어디서 나오나"
직설적 화법으로 사대부를 비판했다. 나라를 부강하게 할 생각은 않고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말로 백성들에게 검소한 삶을 권하는 사대부들이야말로 위선자라고 지적했다. 그는 “나라의 좀벌레들인 사대부는 놀고 먹으면서 하는 일이라곤 없다”며 “그들이 입는 옷이며 먹는 양식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들은 권력에 기댈 수밖에 없고, 청탁하는 버릇이 생겼으니 시정의 장사치도 그들이 먹던 것을 더럽다 할 것”이라고 질타했다. 그는 놀고먹는 사대부를 상업에 종사토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학의》는 고담준론을 논한 책이 아니다. 누에치기, 성곽 축조, 가축 기르기, 집 짓기, 기와 만드는 방법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새로운 기술도 비중있게 소개했다. 이 책에 소개된 국내 상업 및 외국과의 무역 장려, 벽돌을 비롯한 상품의 표준화, 대량생산, 시장 확대, 농공상업에 대한 국가적 후원 강화 등은 근대 유럽의 중상주의 경제 사상과 비슷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그의 혁신안들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는 가난을 구제하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지 못하면 나라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정조에게 《북학의》를 올렸다. 정조는 그 책을 읽고 “네 뜻을 알겠다”고 했지만 정책에 반영하지는 않았다. 당시 정책으로 수용하기엔 너무 혁신적인 사상이었다.
그를 비롯한 실학자들의 ‘이용후생(利用厚生)’ 이념은 성리학을 숭상한 사대부의 벽을 넘기에 한계가 있었다. 박제가는 세력을 잡고 있던 노론 벽파의 미움을 받아 유배길에 올랐다. ‘조선판 국부론’은 사장(死藏)됐다.
홍영식 논설위원 ysho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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