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 출신인 그는 어릴 적에는 말더듬는 게 심했다. 자주 뒷산에 올라 나무들을 상대로 웅변을 하며 고쳤다고 한다. 프로야구 메이저리거를 꿈꾸던 소년이 훗날 복음 전도사로 대형 스타디움에 자주 선 것도 아이러니다.
설득력 있는 말솜씨는 18세 때 세일즈맨으로 능력을 발휘하며 낭중지추(囊中之錐)처럼 드러나기 시작했다. 수려한 외모와 카리스마까지 갖춰 주위에는 늘 사람들이 모였다. 다른 일로도 성공했겠지만, 1940년 남침례교회의 목사 안수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1944년 첫 전도집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49년 LA에서 30만 명을 상대로 복음을 전파하며 전국구 인사로 떠올랐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때를 ‘인생의 분수령’으로 꼽았다. ‘벤허’의 찰턴 헤스턴을 닮은 외모와 언변 덕에 영화, 방송의 러브콜도 받았다.
‘미국의 목사’로 부각된 것은 1966년 닉슨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기도를 맡으면서다. 절친한 존슨 대통령은 그에게 대통령 출마까지 권유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그의 덕에 젊은 날 방황을 끝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레이엄 목사는 한국과의 인연도 남다르다. 전쟁 중이던 1952년 방한해 서울과 부산에서 전도집회를 열고 피란민과 장병들을 위로했다. 1956년 서울운동장 집회에는 8만 명이 모였다. 세 번째인 1973년 여의도 집회에는 사상 최대인 100만 명이 운집해 국내에서 개신교가 번성하는 전기가 됐다.
1992년과 1994년, 두 차례 북한도 방문했다. 부인 루스 여사가 의료선교사인 부친을 따라 중국에 왔다가 1930년대 평양 외국인학교를 다닌 것이 인연이 됐다. 그레이엄 목사는 김일성에게 성서를 전하고 미·북 간의 메신저 역할도 수행했다.
그레이엄 목사는 교파, 이념, 체제를 초월해 복음을 전파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반공보수주의, 가톨릭과의 교류 등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돈, 성(性), 권력, 거짓의 유혹을 멀리한 그의 한결같은 삶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레이엄 목사의 영면은 미국인들에게 종파를 떠나 크나큰 슬픔이다. 우리가 과거 성철 스님, 김수환 추기경을 잃었을 때와 같은 심정일 것이다. 누구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다시 그런 정신적 지주를 가질 수 있을까.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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