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별 블록체인·암호화폐 따라 나뉠 것
4차 산업혁명 시대 새 진화에 대비해야
이경전 < 경희대 교수·경영학 >
앨빈 토플러의 명저 《제3의 물결》은 1만 년 전에 발생하기 시작한 농업을 첫 물결로 봤다. 수렵, 채취, 약탈의 시대에서 벗어나 인류는 작물 재배를 선택했다. 그 결과 노동시간이 길어지고 건강은 나빠졌지만 이는 한 곳에 머물러 사는 삶을 택하기 위한 선택비용일 뿐이었다. 7만 년 전에는 인류가 언어를 발명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갖추는 인지 혁명이 일어났다고 《사피엔스》의 저자가 이야기했지만, 진정한 문명은 곡물창고에 자물쇠를 채우면서 시작됐다고 작가 다니엘 퀸은 주장한다.
곡물창고 관리를 위해 위계 사회가 구성되기 시작하면서 부족민이 같이 일하고 그날의 식량을 나누던 부족주의 사회는 사라져갔다. 계층제는 제2의 물결인 산업혁명을 맞아 재화 생산과 거래가 가격으로 결정되는 시장의 시대를 맞았다. 증기기관과 철도 네트워크로 대표되는 1차 산업혁명과 전기 네트워크와 대량생산으로 대표되는 2차 산업혁명은 위계에 의존하던 봉건사회를 시장의 힘이 큰 자본주의 사회로 변화시켰다.
그러나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로널드 코스의 설명대로 거래비용의 존재는 기업을 존속시키고 대형화했다. 제3의 물결, 즉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3차 산업혁명을 맞아 거래비용 감소로 인한 시장화와 글로벌화가 가속화했지만 조정 및 통합 비용의 감소는 금융, 제조, 서비스 기업의 대형화도 같이 초래했다.
그러면 4차 산업혁명은 어떤 사회와 경제 체제를 가져올 것인가. 국내 한 대학의 연구진은 2090년이 되면 사람들의 99.997%가 ‘프레카리아트’라 불리는 최하위 노동자 계급으로 전락해 사실상 로봇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플랫폼을 소유하거나 플랫폼 스타들이 독점하는 플랫폼 경제가 온다고 예측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이미 우리가 겪고 있는 3차 산업혁명 현상을 과장되게 해석한 것에 불과하며, 70년 후를 소수점 이하 세 자리까지 예측해낸다는 것은 센세이셔널리즘에 불과하다.
연구자들이 커뮤니티, 네트워크가 새로운 사회의 구조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시장과 위계의 중간, 또는 시장도 위계도 아닌 제3의 차원으로서의 커뮤니티 또는 네트워크가 논의됐다. 놀라운 것은 최근에는 농업사회 이전의 부족 시대가 다시 온다거나 다시 와야 한다고 역설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실증적으로도 최신 블록체인·암호화폐(가상화폐) 경제에 부족사회적 메커니즘이 작동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일찍이 프랑스 사회학자 미셸 마페졸리는 “현대 사회는 이미 개인주의 사회가 아니라 부족의 시대”라고 설파하면서 “고정적이고 단일적인 고대의 부족주의와 달리 유동적이고 일시적이며 다양한 취미나 여가 등의 선택적 친목 혹은 감정적 공동체를 중심으로 사회관계가 편성돼 가는 신(新)부족의 시대가 이미 도래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 정도의 부족은 커뮤니티, 네트워크에 가까운 듯하다.
새로운 부족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기술적 토대가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는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스위스 취리히와 아일랜드 더블린대의 연구진은 지난 1월 블록체인 경제 시스템이 새로운 부족주의적 형태를 띤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부족에 참여하는 자들 간의 합의 메커니즘과 기술적 프로토콜에 의해 생산과 분배가 조정되고, 그 부족에 참가하는 이들은 부족 내에서 사용하는 암호화폐를 교환한다.
3차 산업혁명 시대의 사고에 갇혀 있다면 세상은 점점 단일시장으로 통합되고, 화폐는 달러나 유로, 위안화 등의 소수 화폐로 통합되리라 전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영국은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를 택했고,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신고립주의 무역정책을 펴고 있으며, 나날이 새로운 암호화폐가 나오고 있다. 어쩌면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세상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암호화폐를 사용하는 사람과 기계가 어우러져 새로운 부족 사회와 경제를 구축하는 형태로 진화할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떤 부족을 선택할 것인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