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 국책연구기관 컨트롤타워 성경륭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

입력 2018-03-18 18:23   수정 2018-03-19 07:16

"결혼조차 기피하는데… 출산·보육에 맞춰진 저출산 대책은 한계"


[ 고경봉 기자 ]
성경륭 한림대 교수(64)가 지난달 12일 경제인문사회연구회(경사연)의 제7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경사연 이사장은 한국개발연구원(KDI) 등 산하 26개 국책연구기관의 인사·예산권을 쥐고 연구 방향을 설정하는 막중한 자리다. 한국을 대표하는 ‘싱크탱크’들을 진두지휘하면서 국가가 직면한 문제점을 찾아내고 정부에 해결 방안을 제시해야 하는 ‘국가 대표 브레인’인 셈이다. 그의 앞에 놓여진 과제들은 만만찮다. 고용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저출산, 남북문제, 통상 문제 등 잔뜩 얽혀 있는 실타래 더미들이 책상에 쌓여 있다. 그만큼 경사연의 역할도 막중해졌다. 지난해 말 국회가 관련법을 개정해 경사연 이사장을 상임직으로 바꾸고, 경사연에 정치적 중립의무를 부과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성 이사장은 지난 16일 한국경제신문과 취임 후 첫 인터뷰를 하고 “저출산, 저고용으로 촉발된 한국 사회구조 변화는 유례없는 국가재앙”이라며 “모든 국책 연구기관이 머리를 맞대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사장 취임 후 한 달여가 지났습니다.

“산하 연구기관의 인사가 진행 중인 곳이 많아 신경쓸 게 많습니다. 아직 수장을 뽑지 못한 연구기관이 여섯 곳이나 됩니다. KDI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원장은 당초 지난주 선임할 예정이었지만 미뤄졌어요. 이달 말이 돼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정부가 인사를 꼼꼼히 챙기고 있어요. 후보 중 흠결이 발견되면 검증 작업을 다시 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그만큼 좋은 분들을 모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국내 고용 상황이 매우 안 좋습니다.

“고용은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투입한 만큼 결과가 바로 나오지 않는 게 노동시장입니다. 변수가 많고 정책 효과를 보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로서도 고민이 많을 것입니다. 정부 노력 덕분에 고용이 일시적으로 회복될지 몰라도 4차 산업혁명, 저출산 등과 맞물려 장기적으로는 점점 심각한 문제로 부각될 것입니다. 4차 산업혁명은 기회지만 동시에 상당한 위기이기도 합니다. 기존의 산업혁명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기폭제가 됐습니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 때는 다릅니다. 특히 인공지능(AI)의 도래는 일자리 환경 전체를 바꿀 것입니다. 단순 반복 일자리는 물론 진료 분야, 법조 분야, 자문 분야의 고급 일자리를 뺏어갈 가능성이 큽니다. 단기적인 일자리 대책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고용 위기를 풀기 위해 국책연구기관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1987년 민주화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면서 한국 노동자들의 권리도 진일보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강성 노조의 투쟁 방식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한국 산업 자동화를 부추기는 촉발제가 됐어요. 한국 로봇밀도는 세계 1위입니다. 인구 1만 명당 산업 로봇이 531대(2015년 기준)로 세계 평균의 7배에 이릅니다. 4차 산업혁명에 따른 고용 위기에 어느 나라보다 많이 노출돼 있다는 방증이죠. 국책연구기관들이 머리를 맞대고 4차 산업혁명에 따른 일자리 전망, 창출 직업, 소멸 직업을 종합적으로 연구해야 합니다.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일자리 재앙은 우리 예상보다 빨리 올 것입니다.”

▷취임사에서 한국이 맞닥뜨린 첫 번째 위기로 ‘인구소멸’을 강조했는데요.

“2016년 신생아 수는 40만6000명인데 1년 사이 36만8000명으로 줄었습니다. 작년 신생아 중 남자가 절반인 18만 명이라고 보면 지난해 기준 20세 남성인구인 35만 명과 비교해 절반 밑으로 떨어지는 셈이죠. 국방 체계가 흔들리고 수많은 대학이 문을 닫아야 할 것입니다. 인구 감소와 저고용이 맞물리면서 입직이 줄고 그만큼 결혼을 기피하는 현상도 심해질 것입니다. 저출산, 소비 저하, 생산성 하락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죠. 6·25전쟁에 버금가는 국난(國難)의 상황에 진입했다고 봅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악순환의 고리에서 핵심 부분을 찾아 끊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출산 여건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국방은 의무이자 공공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면서 출산은 사적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출산도 국방 못지않은 공공 영역의 관점으로 다뤄야 한다고 봐요. 2006년부터 10년간 저출산 대책에 126조원의 예산을 쏟아부었는데 헛돈을 썼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큽니다. 우리는 세 가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어요. 국가 기반을 흔드는 위기 대응책으로서 과연 이 예산은 충분한 규모였는가. 그리고 그 예산은 목표에 맞춰 집중됐는가, 마지막으로 당사자들의 의견은 얼마나 반영됐는가 하는 것이죠. 예산 지원의 주 목적은 ‘결혼하게 만드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다음 출산, 보육으로 넘어가야 해요. 이를테면 비정규직 청년이나 실업 상태의 청년에게는 적절한 기본 소득을 줘 결혼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줘야 합니다. 그동안 정부 정책은 지나치게 보육에 치우친 측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마저도 충분치 못했다고 봅니다.”

▷국책연구기관의 위상이 커졌습니다.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운영해나갈 계획입니까.

“국책연구기관들도 국가 위기에 맞춰 변화해야 합니다. 기존의 지식체계와 지적 한계를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각자의 역량도 협업을 통해 극대화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외국 이론을 단순하게 적용하거나 답습하고 모방하는 관행, 대화와 토론이 결여된 채 독자적으로 연구하는 행위도 지양하도록 유도할 계획입니다. 앞으로 정부는 기존에 접하지 못한 새로운 문제를 다뤄야 할 일이 많아질 것입니다. 비트코인 논란이 대표적이죠. 이런 일에 준비하고 대처하도록 해결책을 찾아 미리 제시하는 게 국책연구기관의 역할입니다. 더 소통하고 협업해야 합니다. 다른 기관과의 연계 대신 경쟁을 추구하도록 하는 평가 방식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국책연구기관의 탐험가론을 강조했는데요.

“한국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 3만달러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것이죠. 하지만 이를 유지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선진국은 ‘존재하지 않은 길, 가보지 않은 길을 찾아내고 설계하고 준비해서 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나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가본 길에 익숙하죠. 그런 측면에서 한국은 이제 갈림길에 섰다고 봅니다. 안 가본 길로 가야 합니다. 물론 미끄러지기 쉽고 앞으로 나가기 위태위태한 상태이죠. 신대륙을 발견할 때 탐험가들에게 위성항법장치(GPS)가 있었나요. 말 그대로 정처없이 떠났습니다. 한국은 모방하고 변형하고 개선하는 데는 익숙합니다. 교육부터 바꿔야 합니다. 모두 동일한 경로를 좇는 교육의 동질화부터 깨야 합니다. 다양한 경로를 좇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실패해도, 낙오해도 나라가 받혀준다’는 복지체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동질화의 감옥에 갇힌 아이들을 꺼낼 수 있다고 봅니다. 국책연구기관 기능도 여기에 있습니다. 정부가 안 보이는 길을 찾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정부가 지방 분권 강화에 강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균형발전 이론의 전문가로서 어떻게 보십니까.

“분권화는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대치까지 이뤄져야 합니다. 중앙정부는 세세한 고민을 줄이고 더 큰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중앙정부 관료들은 지방의 역량을 못 믿는 게 아니라 기득권을 버리기 싫어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타이트-루즈(tight-loose)’개념이 필요합니다. 국가 목표와 비전, 중앙정부와 지방의 협력 관계는 단단한(tight) 수준에서 관리하고, 나머지 개별정책들은 분산과 위임을 통해 헐겁게(loose) 관리해야 합니다. 핵심가치를 공유하고 나머지는 최대한 분산하는 이른바 ‘위대한 위임’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 성경륭 이사장은 누구?

성경륭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신임 이사장은 균형발전, 복지정책 분야의 이론가이자 행정 전문가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행정수도 공약’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노무현 정부 인수위원회에도 참여해 신행정수도 이전과 혁신도시 계획을 주도했다. 공무원 개혁과 전문성 강화를 위해 ‘개혁 엘리트 1만 양병설’을 주장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4년간 초대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2007년 9월부터는 노무현 정부 마지막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뒤 한림대 강단으로 복귀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2년 18대 대선에서 패한 뒤 재도전을 준비하자 그의 정책 자문그룹인 ‘심천회(心天會)’의 창립 멤버로 참여해 정부 혁신, 복지국가, 지방 분권 분야 공약의 뼈대를 다듬었다.

지난해 19대 대선에서 ‘문재인 캠프’의 포용국가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북유럽의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 등 포용적 성장론을 벤치마킹한 다양한 복지정책 공약을 기획했다.

△1954년 경남 진주 출생
△부산고,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졸업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 박사
△1991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부임
△2003년 대통령 자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장
△2007년 청와대 정책실장
△2017년 포용국가위원회 위원장

고경봉 기자 kg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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