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차별 때리기'… 생일에도 숨죽인 삼성

입력 2018-03-21 17:31  

삼성 창립 80년
'80년 성장신화'가 적폐로 둔갑…내우외환에 시달리는 삼성

●정치권·방송, 총수 지배구조 돌아가며 난타
●삼성에 우호적이면 '적폐'…비판하면 '영웅'
●법인세 연 7조 내는 기업 흔들기 도 넘어

청와대, 이재용 부회장 재판에 '캐비닛 문건'으로 개입
정부, 신규 순환출자 유권해석 2년 만에 뒤집어
여당 의원 '이재용 부회장 집행유예' 판사에 "침 뱉고 싶다"
방송사마다 삼성 비판 프로그램…"균형감각 상실"



[ 노경목 기자 ]
“기사에 제 실명은 넣지 말아 주세요.”

삼성그룹 창립 80주년을 하루 앞둔 21일. 대부분의 기업인과 교수들은 통화 말미에 이런 단서를 달았다. 한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창업자는 “삼성에 대한 호의적인 발언으로 회사가 손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했다. 삼성을 둘러싼 냉혹한 현실이다.

‘삼성 때리기’라는 명분 앞에서는 모든 원칙이 무너진다. 청와대는 진행 중인 재판에 영향을 미치고, 정부 부처는 이미 판단한 내용을 불리하게 바꾼다. 국회는 삼성만을 겨냥한 법안을 만들고, 정치인들은 삼성을 비판하는 발언을 쏟아내 인기를 얻는다. ‘삼성 배싱(bashing·때리기)’이 도를 넘었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목소리를 높이긴 어렵다. 창립기념식은 언감생심. 전 계열사 직원들이 사회공헌을 한다는 얘기도 오해를 살까 봐 홍보조차 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삼성전자 한 곳에서만 올해 7조원가량의 법인세를 낸다. 매출의 90%는 해외에서 힘겹게 벌어들인 돈이다. 한국은 삼성을 이렇게 다뤄도 되는 걸까.

삼성 배싱은 전방위적이다. 삼성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3권 분립’이라는 헌법 원칙도 힘을 잃는다. 청와대는 지난해 7월 이른바 ‘캐비닛 문건’을 공개했다. 박수현 당시 대변인은 “박근혜 정부가 삼성을 지원했다”는 근거라며 카메라 앞에 문서를 펼쳐보였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1심 재판이 한창이던 때였다. 의욕적으로 내놓은 캐비닛 문건은 허무하게 효력을 상실했다. 공개 11일 뒤 열린 재판에서 당시 청와대에서 일하던 관계자가 “언론 보도와 포털 검색으로 작성한 동향 조사 문건”이라며 “작성 과정에 삼성과 전혀 접촉이 없었다”고 설명한 것이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까지 지원사격에 나섰다. 캐비닛 문건이 공개된 날 법정에 출석해 특검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진술을 했다. 청와대와 장관급 인사가 재판 결과에 우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이미 내려진 부처의 유권해석도 타깃이 삼성이면 손쉽게 뒤집힌다. 지난해 12월 공정거래위원회는 신규 순환출자 금지와 관련된 유권해석을 2년 만에 변경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강화된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하기 위해 삼성SDI가 팔아야 할 삼성물산 주식은 500만 주에서 904만 주로 늘었다.

“삼성 오너 일가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려고 법적 제도의 안정성까지 뒤흔드냐”는 비판이 빗발쳤다. 뒤집힌 판단과 소급 적용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도 불거졌지만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미안하다”는 사과만 내놨다.

삼성을 둘러싼 거센 비판 앞에서는 관료들의 소신도 허물어진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차명계좌와 관련해 “금융실명법상 과태료 부과 대상이 아니다”고 말했다. 차명계좌라도 실제 존재하는 사람의 명의면 과세 대상이 아니라는 대법원 판결을 기초로 한 것이다.

곧 정치권 안팎에서 비판이 쏟아졌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이건희 감싸기를 하며 삼성 앞에서 작아지는 금융위원회”라고 압박했다. 결국 금융위는 이달 초 기존의 입장을 완전히 바꿔 이 회장의 차명계좌에 과징금을 부과할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태스크포스(TF)를 조직했다.

삼성에 대한 각종 공격은 삼성에 적대적인 여론을 통해 강화된다. 중립적이거나 삼성에 우호적인 발언을 하는 이들은 ‘적폐’로 공격받는다. 반면 삼성을 비판하는 행위는 영웅적인 것으로 칭송받는다. 균형을 갖춘 발언은 자취를 감추고 공격적인 발언만 집중적으로 생산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지난달 이재용 부회장에게 집행유예 판결을 내린 정형식 부장판사는 갖은 인신공격에 시달렸다. 법원 내부 관계자는 내부 게시판에 석궁 테러를 암시하는 글을 올렸다. 청와대에 정 판사의 파면을 요구하는 청원에도 22만 명이 서명했다. 네티즌은 정 판사의 친인척까지 뒤져 공격하기도 했다. 판사 출신 로스쿨 교수는 “판결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판사를 비난하고 위협하는 것은 법치주의와 사법부 독립에 심각한 도전”이라고 우려했다.

정치인들과 일부 매체는 정 판사를 향한 비판 수위를 올려가며 반사이익을 얻었다. 안민석 민주당 의원은 “재판정을 향해 침을 뱉고 싶다”고 했고, 같은 당 박영선 의원은 “법원에 ‘삼판(삼성과 유착한 판사)’이 있다”고 공격했다.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는 “잘못된 판결로 국민들의 평균 수명이 몇 개월 줄었다”는 말까지 했다.

라디오와 TV 방송에서 일부 출연자와 진행자들은 “정경유착 이후에 삼법(삼성+법원) 유착” “역대급 쓰레기 재판” 등의 원색적인 단어를 동원했다. KBS는 파업이 끝난 뒤 방영된 첫 ‘추적 60분’ 프로그램에서 ‘삼성 공화국’ 2부작을 다뤘다. MBC 역시 파업이 끝난 뒤 처음 방영한 뉴스데스크의 첫 뉴스로 이 회장의 차명계좌를 다뤘다.

SBS도 최근 방송 뉴스로는 이례적인 30분을 할애해 에버랜드 땅값 부풀리기 의혹을 시리즈로 보도하고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삼성을 비판하는 프로그램이 줄을 잇는데 ‘삼성이 언론을 통제한다’는 말이 나오니 어이가 없다”고 했다.

삼성에 대한 한국 사회 전반의 시각은 현저히 균형감각을 상실했다. 한 협력업체 대표는 “세간의 시선과는 반대로 삼성만큼 하도급법을 열심히 지키고 협력업체를 존중하는 대기업이 없다”며 “규모에 걸맞은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최근의 흐름은 옆에서 지켜보기에도 안쓰럽다”고 했다.

도를 넘은 ‘삼성 배싱’이 기업의 경쟁력까지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경영진 사이에서는 “본업에 집중하기 어려울 정도”라는 하소연도 들린다. 실제로 최근 삼성전자에서는 예전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사건·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달 23일 삼성전자가 6조5000억원을 투자한 파운드리(반도체 수탁 생산) 신규 라인 착공식에서는 착공을 알리는 현수막이 거꾸로 걸리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지난 9일에는 최신 설비가 갖춰진 평택 반도체 공장에서 30분간 정전사고가 발생해 최대 500억원의 피해를 입었다. 19일에는 삼성전자 물류창고 신축 현장에서 작업대가 붕괴해 사상자 5명이 발생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삼성은 물론 일반적인 반도체 업체에서도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들”이라며 “오랫동안 내우외환을 겪으며 삼성이 조직 내부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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