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경쟁력 위해 빅데이터·표준플랫폼 필요
소프트웨어 인력양성 위한 추경이 더 바람직
노대래 < 법무법인 세종 고문·전 공정거래위원장 >
1998년 주(駐)독일대사관 재경관으로 근무할 때다. 우리나라의 외환위기 극복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한국 경제 홍보단이 독일을 방문했다. 한스 티트마이어 당시 독일연방은행 총재와 우리 측 단장(대통령 경제특보) 간 면담이 있었다. 티트마이어의 조언은 간결했다. “위기 땐 예쁘게 보이려고 랑콤 화장품도 발라야 하지만 기본은 건강입니다. 한국 경제가 다시 건강해지려면 우선 막힌 체 구멍을 뚫어 무임승차자를 걸러내고, 체 구멍을 계속 크게 해서 원칙에 맞는 구조조정과 경쟁력을 강화해야 합니다.”
2008년께다. 출산율이 개선되는 듯하다가 1.2 이하로 다시 떨어졌다. 여성가족부의 저출산 대책 회의에 참석했다. 관계 부처와 여성 관련 연구기관 대표들이 모였다. 처음에는 저출산 원인을 주로 논의했는데, 점차 출산·보육 예산 부족을 성토하는 자리로 변해 갔다. 예산 지원이 적으니까 출산을 기피한다는 논리처럼 들릴 정도였다. 예산은 모자라는 것이 상례기 때문에 예산 부족 때문이라고 규정하면 관계 기관들이 모두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고, 예산을 따내면 뭔가 일을 하고 있는 듯이 홍보할 수도 있다. 예산과 정책은 묘한 관계가 있다. 여하튼 당시에는 합계출산율이 1.2 아래로 떨어져서 난리였는데 그 후 10년 동안 저출산 대책에 100조원 이상을 투입했는데도 지금은 1.05로 내려앉았다. 정책이 뭔가 핵심을 잘못 짚었기 때문일 것이다.
2018년 1분기 현재 청년실업 대책을 위해 추경을 편성한다고 하니 논란이 한창이다. 추경의 세부 사업이 청년실업의 원인을 면밀히 분석하고 우리 산업의 미래 발전 모습을 정확히 진단해서 잘 설계된 것인지가 핵심인데, 이에 대한 논의는 없이 국가재정법상의 추경 요건만 논란이다. 최근 대학원에서 ‘정책의 신뢰성 제고 방안’을 정책연습 과제로 다뤘더니 학생들 생각은 달랐다. 세계잉여금이 생기면 우선 나랏빚을 갚아야 국가의 위기관리능력이 강화되고, 청년실업 대책으로 쓰려면 그 편익이나 효과가 엄청 크다는 입증이 우선 돼야 하는데 이것이 부족하다는 얘기다. 또 실직 청년을 미래성장동력으로 키워 나가는 국가전략사업의 일환으로 쓰인다면 문제 될 것이 없지 않으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한마디로 추경 예산 편성에 앞서 이런 원인 분석과 검토가 선행됐으면 좋겠다는 의견들이었다.
거시정책을 운용하다 보면 문제가 단순해 재정만 투입하면 간단히 해결되는 사업이나 정책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저출산 대책, 실업 대책, 중소기업 육성이나 국가 연구개발사업과 같이 대책의 가짓수나 지원 프로그램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업은 철저한 원인 규명이 생명이다. 장단기로 나눠 구조적 성격인지를 판단하고 원인 해소에 정책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실제 정책 현장에서는 대책 마련보다 원인 규명이 더 어려운 경우가 많다. 원인 분석을 철저히 해 중요도나 파급 영향의 크기에 따라 재원을 배분하더라도 불이익 계층의 반발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분석 결과가 명확하면 설득이 용이해진다.
어떤 경우는 근본 원인을 규명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이를 치유할 기술이나 재정 능력이 부족해 차선의 대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또 원인을 면밀히 분석하다 보면 최악은 피해야겠기에 차악을 선택할 때도 생긴다. 이렇게 추진한 정책들은 비록 최선이 아니라도 누가 탓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원인 분석이 미흡한 상태에서 이렇게 되면 좋겠다는 막연한 희망에서 목표지향적으로 재정을 투입하면 오히려 비난받기 쉽다.
청년실업 대책 추경이 이렇게 시끄러워진 것도 전략과 목표 없이 남아도는 세금이 있어서 추경한다는 인상으로 비쳤기 때문일 것이다. 토론 과정에서 학생들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모든 분야에서 빅데이터를 축적·분석해 개별 산업의 플랫폼을 개발하고 가장 좋은 플랫폼을 표준플랫폼으로 확산시켜야 국가경쟁력이 생긴다며, 인력이 태부족해 이런 사업이 활성화될 수 없으므로 차제에 소프트웨어 인력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좋겠다는 지적이 있었다. 청년실업자를 모두 소프트웨어 인력으로 양성하는 국가전략사업을 펼치는 추경이라면 우리 미래가 훨씬 밝아질 것이란 제안이다. 귀담아들을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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