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 대·소변, 침 등 체액을 통해 질병을 진단하는 액체생검 기술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감염병뿐만 아니라 암까지 조기 진단해 치료율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액체생검 세계시장 규모도 커지고 있다. 연평균 28.9%씩 성장해 2023년에는 약 4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안성환 지노믹트리 대표는 "환자의 예후 관찰은 물론 질병의 조기진단에도 액체생검의 쓰임새가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간편함이 최대 장점
액체생검은 체액에서 세포, 단백질, 핵산 등의 변화를 관찰하는 방식으로 질병을 진단한다. 특정 질병에 걸리면 이와 관련된 부산물이 혈액에 섞여 혈관 속을 떠돌아다니는 것에서 착안했다. 특정 질병을 판별할 부산물을 어떻게 설계하느냐가 액체생검의 정확도를 좌우한다.
액체생검의 가장 큰 장점은 편리함이다. 고통스러운 조직검사를 하지 않고 체액만으로도 질병 유무를 확인할 수 있다. 의료계에서는 액체생검이 보급되면 검진에 대한 환자들의 접근성이 좋아져 질병의 조기진단율이 높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송상훈 서울대병원 진단검사의학과 교수는 "암은 조기에 진단하면 치료율이 올라가지만 자각증세가 없는 암도 많아 정기검진을 받지 않으면 진단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했다. 안 대표는 "전세계 인구의 70%는 대장내시경을 평생동안 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을 정도로 조기진단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며 "액체생검이 일상화되면 내시경검사, 조직검사 등 기존 검사를 받으려는 환자도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앞다퉈 경쟁 나선 기업들
기업들은 앞다퉈 액체생검 기반 진단키트를 시장에 내놓고 있다. 이제 막 시작 단계인 액체생검 시장에서 먼저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서다. 환자의 혈액을 통해 유전자 돌연변이를 분석해 맞춤형 항암제를 찾아내는 키트를 개발한 로슈진단은 선두에 있다.
아마존, MSD, 텐센트 등으로부터 9억 달러(약 1조원)를 투자받으면서 시장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미국 벤처기업 그레일은 액체생검 분야의 유망주로 꼽힌다. 지노믹헬스, 바이오셉트, 트로바진 등도 혈액검사를 통해 암을 진단하는 키트를 개발하고 있다.
국내 업체들도 속속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지노믹트리는 대변으로 대장암을 스크리닝하는 진단키트를 개발했다. 시료로 혈액보다 대변을 사용하면 더 정확한 분석이 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지난해 유럽인증(CE)을 받았다. 국내에서 임상시험을 마쳤고 이르면 다음달 식품의약품안전처에 3등급 의료기기로 품목허가를 신청할 계획이다. 안 대표는 "식약처의 품목허가가 나오면 국내와 유럽 시장에서 본격적으로 마케팅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유전자 분자진단 전문기업 파나진은 지난해 식약처와 한국보건의료연구원(NECA)으로부터 비소세포 폐암 환자의 혈액을 분석해 맞춤 치료제를 찾는 'EGFR 유전자 돌연변이 진단키트'의 품목허가와 신의료기술 인정을 모두 받았다. 싸이토젠은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는 살아있는 혈액종양세포(CTC)를 포집해 분석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바이오인프라는 폐암, 위암, 간암, 난소암, 췌장암 등 8개 암에 대한 검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회사 측은 자체 데이터를 기반으로 분석했을 때 추가된 난소암, 췌장암의 경우 특이도와 민감도가 모두 90% 이상을 기록하는 등 높은 정확도를 보였다고 설명했다.
◆"기술적으로 미성숙"…임상 근거 더 필요 지적도
피 한 방울로 260여개의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던 테라노스가 지난 13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로부터 사기 혐의로 50만달러(약 6억원)의 벌금을 받게 되면서 액체생검이 기술적으로 아직 미숙한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특히 암 진단 분야에서는 넘어야 할 기술적인 허들이 많다는 지적이다. 장세진 서울아산병원 병리과 교수는 "암은 형태 위치 등에 따라 다양하기 때문에 혈액검사만으로 발병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높은 정확도로 암을 스크리닝했다고 하는 진단기술들도 후향적인 연구가 대부분이며 대규모 임상시험 근거를 갖춘 곳은 많지 않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액체생검의 활용성에 대해선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안 대표는 "액체생검은 기존의 진단법을 대체하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며 "기존의 방법에 더해 진단 절차가 하나 더 생겨났다고 본다면 암을 조기에 진단할 수 있는 확률은 더욱 올라갈 것"이라고 했다. 송 교수는 "암을 치료하기 위해선 조기진단이 핵심과제"라며 "임상적인 근거를 앞으로도 꾸준히 쌓아간다면 질병의 조기진단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임락근 기자 rkl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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