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술 재조합 혁신의 싹 틔워야

입력 2018-03-30 17:52  

"증기기관 같은 파괴적 혁신 위해
中企 창의성 발휘 기반 넓혀야"

이성일 < 한국생산기술연구원장 >



목화의 면섬유와 씨를 분리하는 조면기는 18세기 미국 남부지역의 목화산업에 파란을 일으켰다. 조면기 한 대가 50인분의 작업을 수행했고, 후속 모델은 초창기 제품보다 작업량이 50배 더 늘었다. 이렇게 높아진 생산성은 미국의 섬유산업 발전을 견인했지만 조면기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다른 산업에 미친 파급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증기기관은 전 산업 분야에 영향을 끼쳤다. 증기의 열에너지를 기계의 동력으로 전환하면서 공장의 생산성은 200배 증가했고, 증기기관차와 증기선은 교통·물류·무역의 판도를 바꿨다. 증기기관과 같은 파괴적 혁신 사례를 범용기술이라고 부른다.

다른 산업 분야에까지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범용기술의 등장은 저성장 고실업률 시대에 더욱 간절해지고 있다. 하지만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는 범용기술의 출현은 1970년대 이전에 끝났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베스트셀러 《사피엔스》를 쓴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도 인류의 미래를 전망한 《호모데우스》에서 “과거에는 한 세기에 한 번 놀라운 발명품을 내놓는 것으로 충분했다면, 지금은 2년마다 한 번씩 기적을 내놓아야 한다”고 진단한다.

2년마다 한 번씩 기적을 내놓는다고 해도 이 기술들이 증기기관이나 내연기관, 반도체와 같은 생산성 향상을 가져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낮게 달린 과일은 지난 300년간 모두 따 먹혀 없어졌다는 주장이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높은 가지에도 먹을 만한 게 남아 있을 수 있다. 그것을 따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거름을 주고 가지치기를 한다면 이듬해에는 다시 낮은 가지에 과일이 달릴 수도 있는 일이다.

혁신은 꼭 엄청나게 새로운 것에서만 일어나지는 않는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창의적 재조합만으로도 가능하다. 부족한 것은 신기술이 아니라 재조합 혁신이 가능한 환경일 수도 있다. 사람, 기술, 정보 등이 경계 없이 넘나들며 소통·융합하는 협력 생태계 조성이 절실한 이유다.

1987년 100억원으로 시작한 국내 산업기술 연구개발(R&D) 지원 예산이 올해 3조1600억원으로 증가했다. 투자 규모는 300배 이상 확대됐지만 투자 방식은 30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아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다행히 지난 13일 발표된 정부의 ‘산업기술 R&D 혁신방안’은 단기성과 및 목표보다는 혁신생태계 구축에 방점이 찍혀 있다. 개별기업의 요소기술 중심 R&D에서 신산업 육성을 위한 전략적 R&D 강화로, 폐쇄·통제기반의 관리시스템에서 융합·개방·자율 관리시스템으로, 기술 개발 성공 여부에서 사업화 제도개선 쪽으로 지원 방향을 튼 것이 골자다.

이 추진전략 중에 산업원천기술, 업종특화 핵심기술과 함께 융합, 플랫폼, 실증에 대한 투자 확대로 신산업 시장을 열겠다는 방안이 눈에 띈다. 개방형 R&D를 활성화하고 사업화 역량이 우수한 중소·중견기업이 신산업 육성을 주도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중소·중견기업은 몸집이 작고 유연하며 의사결정이 빨라 혁신에 더 적합하다. 이들의 아이디어와 경험이 자유롭게 발휘되고 반영될 수 있는 기회를 넓히는 데서 재조합 혁신의 싹이 틀 수 있다. 산업기술 R&D 혁신방안이 중소·중견기업을 혁신형 기업으로 육성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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