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졸업장이 '지적능력 징표' ?
대학졸업장 필요 없는 일자리에
학위 요구하는 기업 여전히 많아
입사지원서 걸러내는 수단 삼아
학위는 '쓸모 있는 하인' 그쳐야
'학력인플레→대학등록금 인상→
능력 있어도 구직실패' 부작용 초래
산업계 안팎서 개혁 요구 거세져
[ 주용석 기자 ]
“요즘 같으면 취직하지 못했을 거야.” 나이 든 사무직 직원들이 종종 하는 말이다. 그들의 업무 능력이 떨어지는 게 아니다. ‘학력 인플레’ 문제다. 과거 대학 졸업장이 필요 없던 일자리에 학위를 요구하는 기업이 많다.
하버드경영대학원의 지난해 조사를 보면 고용주의 61%는 입사 지원자가 업무 능력과 경험이 있는데도 단지 대학 졸업장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지원자를 탈락시켰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대학 졸업장이 없으면 지금 갖고 있는 직업을 잃을 만큼) 학력 인플레의 영향을 받는 노동자가 620만 명에 달할 수 있다”는 게 하버드 조사 결과다.
학력 인플레가 일어나면 (대학에 가려는 수요가 늘기 때문에) 대학 등록금이 오르고 대학생의 빚이 늘어나며 능력 있는 구직자들이 일할 기회를 잃는다. 고용 차별을 금지하는 법에도 어긋난다.
1964년 제정된 시민권법은 고용주가 인종과 피부색, 종교, 성, 국적 등을 이유로 고용 차별을 해선 안 된다고 못 박고 있다. 1971년 ‘그릭스 대(vs) 듀크전력’ 소송에서 연방대법원은 특정 집단이 흔히 ‘불평등 효과(disparate impact)’로 알려진 차별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만장일치로 판결했다. 구체적으로 고용주가 제시하는 채용 요건은 업무와 직접적 연관성이 있어야 한다.
미국 의회도 1991년 이 같은 기준을 분명히 했다. 교육 수준을 비롯한 모든 채용 절차가 여기에 해당한다. 예컨대 IQ 시험이 필요하다면 고용주는 공인된 시험을 활용해야 한다.
주(州)나 지역에선 고용 차별을 금지하기 위해 추가 제한을 두기도 한다. 뉴욕시는 고용주가 (이직자에 비해) 실업자를 차별하는 것을 금지한다. 이전 직장에서 연봉을 묻는 것도 제한한다. 미국 내 29개 주는 공공기관이 채용 과정에서 구직자의 과거 범죄 경력을 조사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9개 주는 민간기업에도 이런 규정을 적용한다. ‘평등고용기회위원회’는 지난해 철도회사 CSX를 고발했다. 이 회사의 체력검사에서 남성 구직자가 여성 구직자보다 월등히 높은 비율로 합격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대학 졸업장은 좀 다른 대접을 받는다. 기업은 대학 졸업자가 기본적인 업무능력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 보니 대학 졸업장은 지적 능력의 징표 같은 역할을 한다. 기업이 (고등학교 졸업자보다) 대졸자를 우대한다고 해서 법적으로 차별 논란에 시달린 적도 없다.
하지만 학력 인플레는 분명 불평등 효과와 연관이 있다. 불평등 효과를 검증하는 수단으로 흔히 ‘80% 룰(rule)’이 사용된다. 특정 집단의 선발 비율이 다른 집단의 선발 비율 대비 80% 미만이면 고용 차별이 있다고 보는 게 80% 룰이다.
미국 노동통계국에 따르면 25세 이상 노동인구 중 아시아계는 61%가 대학 졸업장을 갖고 있다. 백인은 이 비율이 40%이고, 흑인은 29%, 히스패닉은 20%다. 여기에 80% 룰을 적용해보자. 기업이 채용 과정에서 대학 졸업장을 요구하면 백인은 아시아인에 비해, 흑인과 히스패닉은 백인이나 아시아인에 비해 고용 차별을 당할 수밖에 없다.
꼭 대졸자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닌데도 대학 졸업장을 요구하는 것은 차별금지 원칙에 어긋난다. 2014년 한 설문조사를 보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예컨대 기업에서 경영진을 돕는 비서직이나 단순 보좌직의 경우 현재 대졸자는 19%에 불과한데, 요즘 채용 과정에선 대학 졸업장을 요구하는 곳이 많다.
학력 인플레는 고용주 입장에서 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용주가 소송당할 위험 없이 입사 지원서를 걸러낼 수 있는 잣대 중 하나가 ‘대학을 졸업했느냐, 아니냐’ 여부다.
하지만 하버드 보고서에서도 지적했듯, 굳이 대학 졸업장이 필요 없는 일에 대졸자를 쓰면 기업에는 인건비 부담이 늘어난다. 그런 일에 배치된 대졸자는 이직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고 고졸자보다 더 생산성이 높지도 않다.
그렇기 때문에 학력 인플레를 줄이는 것은 고용주와 정책 당국자 모두 손쉽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론적으로 보면 그렇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많은 기업이 현 상태에 큰 불만이 없는 만큼 (학력 차별을 금지하는 방향으로) 시민권법을 개정하려면 상당한 정치적 의지가 필요하다.
외부 여건은 무르익고 있다. 섬유업계에선 일부 기업이 특정 집단에 채용 쿼터(제한)를 두는 게 법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학력 인플레에 맞서 싸우는 역할을 (페이팔 창업자) 피터 틸이 맡으면 어떨까. 그는 대학에 가지 않거나 중퇴하고 회사를 차리는 학생에게 10만달러의 장학금을 주고 있지 않은가. 미 법무부 산하 연구소가 학력 차별을 제한하는 방안을 마련하면 어떨까.
‘그릭스 vs 듀크전력’ 판결에서 워런 버거 당시 연방대법원장은 “(학위는) 쓸 만한 하인”이라면서도 “그것이 현실의 주인이 돼선 안 된다”고 했다. 이런 상식이 법정에서도 통해야 할 때다.
원제=Degree Inflation and Discrimination
정리=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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