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평화협정과 '디테일의 악마'

입력 2018-04-20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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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식 논설위원


1991년 7월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에 서명할 때 특별한 펜이 등장했다. 두 정상은 미사일 탄두를 녹여서 만든 펜으로 협정에 서명했다. 냉전에 마침표를 찍는다는 극적인 효과를 노린 것이다. 중국 춘추전국 시대에도 전쟁이 끝났을 때 무기를 부수거나 녹이면서 평화를 다짐하는 의식이 종종 행해졌다. ‘주검위리(鑄劍爲犁·칼을 녹여 보습을 만든다)’라는 말이 나온 배경이다.

오는 27일 세계의 이목은 남북한 정상회담이 열리는 판문점으로 향할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8일 “남북한 종전(終戰) 논의를 축하한다”고 말하면서 판문점은 더욱 주목받고 있다. 한국은 정상회담에서 종전선언을 이끌어 낸다는 방침이다.

종전선언은 1953년 7월27일 서명한 정전(停戰)협정의 종식을 뜻한다. 정전협정 체결 뒤 65년간 교전 당사자 간 종전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한반도는 전쟁도, 평화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이 이어져왔다.

종전선언 다음 목표는 평화협정 체결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제 언론사 사장들과의 간담회에서 “정전체제를 끝내고 종전선언을 거쳐 평화협정 체결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폐기가 우선돼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숱한 난관을 뚫어야 한다. 문 대통령이 “‘디테일의 악마’를 넘어서는 것이 가장 큰 과제”라고 말한 그대로다.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 의지를 표명했다고 하지만, 미국이 요구하는 수준을 충족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미국은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하는 반면, 북한은 ‘단계적·동시적 조치’를 내세우고 있다. 북한 핵시설 사찰 및 검증 방법을 놓고도 격돌이 예상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결실이 없다면 회담장을 뛰쳐나올 것”이라고 한 것을 보면 양측 간 시각차가 여전하다는 점을 말해준다.

모든 과정이 잘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북한을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남북한은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2007년 10·4 정상선언 등에서 평화체제 추진에 합의했지만, 북한의 핵 개발과 미사일 도발로 번번이 불발했다.

이번엔 사정이 다르다. 북한이 또 합의를 번복하거나 위장평화 술책을 쓴다면 더 강력한 제재와 군사조치까지 각오해야 할 것이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확인한 뒤 북한 미사일을 녹여 만든 펜으로 평화협정에 서명하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

ysho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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