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자 소환 일시·장소 등
언론에 정보 알려줘 협조
취재 과열로 인한 사고 방지
무죄추정의 원칙 어긋나
사과·반성 보여줘야하는 장소
비슷한 혐의 받는 피의자라도
여론 관심 따라 공개여부 갈려
검·경과 언론 합작 '기형적 산물'
"살인·강간 등 중대범죄 외에
포토라인 거부할 수 있어야"
[ 이수빈 기자 ] 서울 혜화역에서 지난 19일 열린 ‘홍익대 누드모델 몰카 편파수사 규탄시위’ 현장. 여성 1만여 명이 모여 “피의자가 여성이라서 중죄를 지은 강력범처럼 포토라인에 섰다”고 주장했다. 몰카촬영 피의자인 안모씨(25)는 시위가 열리기 1주일 전 영장실질심사(구속 전 피의자 심문)를 위해 서울 마포경찰서에 출두하며 포토라인에 섰다. 몰려든 취재진에게 에워싸인 안씨는 ‘죄송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였고, 이 장면은 전국에 생중계됐다. 그동안 몰카 피의자가 포토라인에 선 사례는 거의 없다. 지난달 서울의 한 모텔에서 여성을 성폭행하고 이 장면을 몰래 촬영한 파렴치한 피의자도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다는 점이 지적되며 여성 시위대의 감정선을 자극했다.
‘초원복집’ 때 시작… 김기춘 전 장관이 첫 사례
비난 여론이 커지자 마포경찰서는 “포토라인에 세운 게 아니라 피의자를 이송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촬영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사건에 대해 수사당국은 피의자 소환 일시와 장소 등의 정보를 언론에 제공하며 취재에 협조해온 게 사실이다. 취재 과열로 인한 사고를 예방하고 현장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다. 경찰 관계자는 “국민이 주목하는 사건은 경찰서 현장에만 수백 명의 기자가 몰린다”며 “피의자 소환과 이송 등 주요 일정을 언론과 공유하고 포토라인을 협의하는 이유도 자칫 발생할지 모를 안전사고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포토라인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92년 ‘초원복집 사건’이 터지면서다. 당시 김기춘 법무부 장관(박근혜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부산지역 기관장들을 초원복집에 불러 모은 뒤 대선에서 지역 출신 김영삼 후보를 밀어야 한다며 “우리가 남이가, 이번에 안 되면 영도다리에 빠져 죽자”고 말했다.
이를 경쟁자인 정주영 후보 측이 몰래 녹취해 언론에 공개하면서 정 후보와 김 장관이 모두 검찰 조사를 받게 됐다. 먼저 검찰에 출석한 정 후보에게 취재진이 일시에 몰리면서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이 와중에 한 사진기자의 카메라에 정 후보가 이마를 부딪혀 피가 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포토라인이 설치됐다. 그 덕분에 김 장관이 검찰에 소환된 날은 아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무죄 추정의 원칙’이냐 ‘국민의 알권리’냐
1994년 12월 한국카메라기자회와 한국사진기자회가 ‘포토라인 운영 선포문’을 발표하면서 포토라인이 하나의 취재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는 언론 자체 규약에 따른 것일 뿐 수사기관 차원의 공식 지침은 여전히 없었다. 검찰과 경찰이 피의자 이동 경로를 언론에 슬쩍 흘리면 취재진이 동선에 맞춰 대기하고 있다가 피의자가 나타났을 때 사진 및 영상을 촬영하는 방식이 굳어졌다. 2002년 법무부 훈령으로 ‘인권보호수사준칙’이 제정되면서 △피의자가 공적 인물이고 △취재 과정에서 물리적 충돌이 예상되며 △피의자가 동의할 때 포토라인 설치 등을 위해 이동 정보를 언론에 제공할 수 있다는 원칙이 처음 마련됐다. 공직자가 아닌 피의자는 어떤 기준으로 공개할지 아직 명확한 기준이 없다. 홍익대 누드모델 몰카 사건에서 보듯 비슷한 혐의를 받는 피의자라 할지라도 여론의 관심에 따라 공개 여부가 달라지는 이유다.
포토라인이 ‘사과와 반성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장소’가 되다 보니 법원 판결이 나기도 전에 여론재판에서 유죄가 선고된다는 우려도 있다. 즉 무죄 추정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설명이다. 2007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변양균·신정아 스캔들’이 대표적이다.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수차례 포토라인에 서면서 국민적 질타를 받았지만 뇌물수수 횡령 등 대부분 혐의를 무죄로 판결받았다. 최근 한진그룹 총수 일가도 검찰 기소 전 잇달아 포토라인에 서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에 이어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이 오는 28일 포토라인에 설 예정이다.
“검경과 언론이 합작한 기형적 산물”
법무부 인권보호수사준칙과 달리 피의자가 포토라인에 서길 원하지 않을 때도 수사기관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작년 3월 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청사 외부 출입문이 아니라 엘리베이터로 이동하게 해달라고 서울중앙지법에 요청했다. 출입문 근처에 설치된 포토라인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법원이 이를 거절하면서 박 전 대통령은 포토라인에 설 수밖에 없었다.
포토라인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실적을 홍보하고 피의자를 위축시켜 수사에 유리하게 활용하려는 수사당국과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보도에 열을 올리는 언론이 합작한 기형적 산물이라는 시각이다. 부장검사 출신인 곽영철 법무법인 충정 고문변호사는 “수사는 비공개가 원칙이기 때문에 기소되지 않은 피의자는 본인이 포토라인에 서기 싫다고 하면 안 세우는 게 맞다”고 말했다. 연쇄살인, 강간 등 국민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긴급 사안은 예외로 둘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건까지 포토라인을 운영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게 곽 변호사의 주장이다.
이수빈 기자 ls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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