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드러진 붓꽃·작약·라일락… "누가 내 이름을 불러줄까"

입력 2018-06-01 19:52  

1800여 종 보유한 '신구대 식물원'

성남 캠퍼스 옆에 2003년 개장
나도승마·단양쑥부쟁이·섬시호 등
멸종위기 야생식물 다수 길러
라일락 370여 종…세계 두 번째 보유

주말엔 가족·연인 방문객 북적



[ 구은서 기자 ]
“봄에는 꽃을 주는 사람이 되자.” 시인 김현은 시 ‘조선마음8’에서 이렇게 말했다. 봄꽃이 지고 여름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6월 주말이다. 꽃을 꺾어 선물하는 대신 꽃밭을 거니는 시간을 가족, 연인에게 선물하는 건 어떨까.

경기 성남에 있는 신구대 식물원은 방문객에게 계절마다 다른 꽃을 선물하는 공간이다. 총 57만㎡ 규모(개방 공간은 16만㎡)의 식물원에는 1800종의 꽃과 풀, 나무가 사계절을 수놓는다. 봄에는 튤립축제(4월)와 라일락축제(5월)가, 여름에는 산수국축제(6월)가 열린다. 연꽃축제(7~8월)에는 80여 종의 연꽃을 전시한다. 가을에는 꽃무릇축제(9월)와 해국·국화전시(10월)를 한다. 겨울철인 12~2월엔 식물원 곳곳을 트리전구로 꾸민 꽃빛축제가 장관이다.

전정일 신구대 식물원장은 “7월에 해바라기 30여 종을 선보이는 전시를 시작하려고 한창 준비 중”이라며 “식물원은 살아있는 식물 갤러리이기 때문에 매일매일 색다른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식물들의 인큐베이터이자 보육원

“좋은 식물원이 많고 찾는 사람이 많은 나라가 선진국이죠.” 이숭겸 신구대 총장의 ‘식물원 예찬론’이다. 2003년 문을 연 신구대 식물원은 올해 개원 15주년이다. 대학 부지 외에 별도로 식물원을 조성해 방문할 수 있도록 꾸민 건 국내 대학 중 신구대가 유일하다.

신구대 식물원은 식물들의 인큐베이터이자 보육원이다. 2010년 환경부로부터 ‘멸종위기동식물 서식지외보전기관’ 지정을 받아 날개하늘나리, 섬시호, 단양쑥부쟁이, 나도승마 등 지구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멸종위기야생식물을 길러내고 있다. 전 원장은 “식물원에서 보전해온 층층둥굴레는 멸종위기야생식물 2급으로 지정돼 있었는데 수가 많이 늘어나 지난해 해제됐다”며 “우리 식물원이 한몫한 것 같아 여간 뿌듯한 게 아니다”고 말했다.

전 원장은 1년의 4분의 1은 해외에 나가 있을 정도로 전 세계 곳곳으로 발품을 팔며 희귀종을 수집해오고 있다. 인근 지역이 개발되면서 베어질 뻔한 라일락 나무를 ‘입양’해 식물원에 심기도 했다. “30살이 된 나무 한 그루를 베어 낸다는 건 30년이라는 시간을 삭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런 노력으로 가꿔진 식물원은 ‘살아있는 식물학 강의실’이기도 하다. 신구대 환경조경과, 원예디자인과 재학생들은 이곳에서 수천 종의 식물을 보며 자연 속에서 강의를 듣는다. 수목원전문가, 가드너, 시민정원사 등 시민들을 위한 꽃과 나무, 정원 관련 교육과정도 운영 중이다.

라일락만 370여 종… “식물은 관상용 넘어 미래 자원”

이 총장과 교직원들은 식물원을 조성하기 위해 10년간 전 세계 45개국 식물원을 직접 탐방했다. 많은 돈이 들어갔고 지금도 들어간다. 대학이 이처럼 품을 들여 식물원을 가꾸는 이유를 전 원장은 연구와 보전에 대한 사명감 때문이라고 했다. “정원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식물종의 수집과 연구를 통해 후손들에게 값진 기록을 남겨줄 수 있다”는 설명이다. 방문객들은 입장료(성인 7000원, 초·중·고생 5000원)를 통해 식물종 연구와 보전에 기여하는 셈이다.

식물원 식물들은 사람의 주민등록번호와 비슷한 등록번호를 하나씩 갖고 있다. 연구진은 이 번호로 식물의 수집처, 수집 시기 등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하고 있다. 전 원장은 “식물원 면적의 3분의 2 정도는 식물을 보전하기 위해 비공개로 남겨두고 있다”며 “연구진끼리는 그 공간을 ‘보물창고’라고 부른다”고 전했다.

신구대 식물원의 ‘시그니처’는 라일락이다. 전 세계 식물원 중 두 번째로 많은 370여 종의 라일락을 확보했다. “그가 그린 꽃은 명사(名詞)가 아니라 동사(動詞)”라는 찬사를 받은 안진의 화가는 신구대 식물원 갤러리에서 그림 전시회도 열며 라일락 그림도 새로 그려 걸었다. 전 원장은 “몇 년만 더 지나면 라일락 꽃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라일락 계곡이 될 것”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라일락 수집은 ‘보랏빛 향기’ 때문만은 아니다. 식물자원으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 라일락은 한국 식물사에서 상징적인 존재다. 미 군정청 소속의 한 식물 채집가는 1947년 북한산에서 야생의 털개회나무 종자를 채취해 미국에서 원예종으로 개량하고 ‘미스킴 라일락’으로 명명했다. 미스킴 라일락은 병해충에 강하고 향이 짙어 미국과 전 세계 라일락 시장의 30% 안팎을 점유할 정도로 인기 종이다. 이처럼 뿌리가 국내에 있지만 우리나라로 돌아오는 혜택은 없다. 로열티를 주고 역수입하는 실정이다. 전 원장은 “관상용 연구용을 넘어 미래 자원이라는 측면에서도 식물원 가치는 갈수록 중요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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