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후야오방의 눈물, 톈안먼의 비극

입력 2018-06-04 17:35  

김태완 논설위원


1989년 5월 초부터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중국 수도 베이징의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언론 자유, 민주적 선거, 정치범 석방, 부패관리 척결 등을 내걸고 시위를 벌였다. 4월15일 ‘개혁과 청렴의 상징’으로 불리던 후야오방(胡耀邦) 전 공산당 총서기의 사망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

후 전 총서기는 1982년 중국 최고지도자 덩샤오핑에 의해 총서기로 발탁된 인물이다. 덩의 노선에 맞춰 개혁·개방을 적극 추진했지만 당내 민주화와 부패 척결과정에서 보수파와 대립했다. 1985년 이후 잇따라 터진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에도 의견이 엇갈렸다. 덩샤오핑은 학생 시위를 ‘서구 자본주의에 물든 반(反)사회주의 활동’으로 본 반면, 후야오방은 법치와 민주화로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다. 후야오방은 1987년 “자산계급 자유화를 용인하는 치명적 실수를 했다”는 비판을 받은 뒤 총서기직에서 해임됐다. 그는 장례식 때까지만 해도 당으로부터 최고 예우를 받았다. 그러나 대학생들이 그에 대한 추모 활동을 이유로 거리로 쏟아져나오면서 그의 이름조차 ‘금기어’가 됐다.

톈안먼 사건은 그해 6월4일 시위대가 맨몸으로 진압 탱크를 막은 사진이 전 세계로 타전되면서 그 실체가 알려졌다. 중국 정부는 시위대 875명이 목숨을 잃고 1만4550명이 부상했다고 발표했다. 군경도 56명이 죽고 7525명이 다쳤다고 했다.

후야오방은 2015년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탄생 100주년 행사를 계기로 복권됐다. 이 행사에는 시진핑 주석을 비롯한 정치국 상무위원 전원이 참석해 그의 정치적 업적을 찬양했다. 그러나 톈안먼 사건은 복권되지 못했다. 중국 공산당은 톈안먼 사건을 ‘1989년 정치풍파’라고 부른다. “소수 자유화 분자들이 후야오방 추모 활동을 기회로 반(反)당·반사회주의적 활동을 한 폭동 사건”으로 규정한다.

어제 톈안먼 사건 29주년을 맞아 베이징시는 계엄과 같은 삼엄한 경비태세를 펼쳤다. 톈안먼 광장 주변 창안대로 곳곳에 무장경찰이 배치됐고, 공항에서나 볼 수 있는 검색대도 여기저기 설치됐다. 톈안먼 사건 유족단체인 톈안먼어머니회는 시진핑 주석에게 보낸 공개편지에서 “6·4(톈안먼 사건)는 국가의 인민에 대한 범죄이므로 반드시 새로이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지난 29년간 중국은 경제부문에서 눈부신 성장을 했지만, 정치·사회 개혁은 여전히 부진하다. 오히려 시진핑 주석이 종신 집권의 길을 여는 등 정치개혁은 후퇴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후야오방의 눈물은 닦아줬지만, 톈안먼 사건 희생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기에는 중국의 갈 길이 아직도 멀어 보인다.

김태완 논설위원 tw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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