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 전 필자가 판사로 근무하던 시절 소액사건 법정에서의 일이다. 당시 소액재판에는 10만원권 자기앞수표 분실사건이 많았다. 수표를 분실한 사람과 취득한 사람이 법정에서 다투게 되는데 양쪽이 모두 피해자인지라 대부분 법리를 떠나 수표금을 일정하게 나눠 갖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한다.
상황이 발생한 날도 상거래에서 수표를 취득한 40대 후반 여성과 수표를 분실한 사람이 법정에서 다퉜다. 재판장이던 필자는 당시 관례에 따라 수표금을 일정 비율로 나눠 갖는 조정을 권유했는데 수표를 분실한 사람은 받아들였으나 취득한 여성은 법리상 자신이 불리함에도 계속 돈을 더 요구하며 조정에 응하지 않았다.
후속 사건이 밀려 있는 상황에서 당사자가 계속 고집을 피우는 것에 마음이 다급해진 필자는 즉석에서 변론을 종결하고 그 여성에게 패소판결을 선고했다.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선고를 하고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그 여성은 황급히 법정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날 퇴근해 집에 있는데 어떤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할머니는 “내 딸이 오늘 법정에 갔다 와서 드러누워 앓고 있는데 도대체 판사가 어떻게 했기에 내 딸이 저 지경이 됐느냐? 나도 당신 집에 찾아가 드러눕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여성이 법정에서 판결을 선고받는 순간 판사의 태도에 얼마나 당황스럽고, 또 많은 방청객들 사이에서 부끄러웠을까를 생각하니 온몸에 식은땀이 솟았다. 다행히 그 할머니가 집까지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그 사건은 이후 필자에게 항상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 보게 하는 교훈을 줬다.
판사 재직 시 우연히 성당봉사모임에 나갔던 첫날의 기억도 잊을 수 없다. 법원이라는 관료사회의 수직적 인간관계에 익숙해 있던 필자는 봉사단체 구성원들의 희생과 봉사정신, 그리고 삶에 대한 나름의 지혜로운 생각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날의 만남은 수평적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줬고, 그 이후 재판 때마다 당사자들이 모두 소중한 인격체라는 생각을 잊지 않도록 해줬다.
인간관계에서 절대적인 옳음과 그름이란 없으며 우리가 알고 느끼는 모든 것들은 다 상대적인 것이다. 여행지에서의 낯선 공간감, 나이에 따라 달라지는 시간에 대한 느낌 등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도 각자가 처한 위치와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변하기 마련이다.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은 그래서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항상 간직해야 할 덕성이자 삶의 지혜가 아닐 수 없다. 맹자(孟子)는 “남을 예우해도 답례가 없으면 자기의 공경하는 태도를 돌아보라”고까지 하지 않았던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