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개선사 석등기의 비밀
통일신라 때 세워진 석등
석등의 기둥 표면에 개선사가
석보평의 논 구입 과정 기록
드러난 토지재산의 실체
토지 14결 매입 때 벼 100석 지불
토지면적·가격정보 자세히 담아
석등기로 알 수 있는 농업혁명
7세기 초에서 10세기 말까지
개별 세대 조세 부담 47배 증가
가장 오래된 매전(買田) 기록
전남 담양군 남면 학선리에 통일신라기에 세워진 높이 3.5m의 석등이 있다(보물111호). ‘개선사(開仙寺)의 석등’이라 한다. 개선사란 절이 언제 세워지고 언제 허물어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반이 석등을 찾았을 때, 석등은 물이 가득한 논에 잠겨 있었다. 사진 자료는 1933년의 것인데 여전히 중대(中臺) 이하가 논 가운데 묻힌 상태다. 민족의 역사와 문화가 쇠락한 나머지 소중한 문화유산이 방치되고 있는 스산한 풍경이다. 등을 밝힌 불집은 여덟 기둥으로 둘러싸였다. 그 기둥의 표면에 개선사가 석보평(石保坪)의 논을 구입하게 된 전후 사정이 새겨져 있다. 이하 ‘석등기(石燈記)’라 부른다. 석보평은 조선시대엔 석보리라 했으며, 현재는 화순군 이서면 도석리다. 태반이 동복호에 수몰됐다.
석등기를 대강 소개한다. 868년 2월 경문대왕과 문의황후, 이들의 큰딸(훗날의 진성여왕)이 발원해 두 등을 걸었다. 그러자 귀족 김중용이 기름값으로 벼 300석을 시주했다. 그것으로 스님 영판이 석등을 세웠다. 891년 스님 입운이 진성여왕이 하사한 벼 100석으로 경주 오호비소리에 사는 공서와 준휴로부터 석보평에 있는 대업(大業) 명의의 물가 논 4결(結)과 구석 논 10결을 정상의 절차를 밟아 구입했다.(이하 생략) 석등기는 현재 전하는 최고(最古)의 매전(買田) 기록이다. 거기에 9세기 신라의 지배체제 내지 토지제도의 실상을 전하는 정보가 담겨 있다. 그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1100년을 내려온 비밀이었다.
토지재산의 실체
한 가지 비밀은 매매된 토지의 실체에 관한 것이다. 개선사가 14결의 토지를 매입하면서 벼 100석을 지불했으니 1결의 가격은 벼 7.14석이다. 토지가격은 토지로부터의 순수익을 이자율로 나눈 것과 같다. 이에 토지가격×이자율=총생산×순수익률의 관계가 성립한다. 이자율, 총생산, 순수익률에 관한 정보는 100년 뒤인 992년의 것이 《고려사》에 전한다. 이자율은 40%, 1결의 총생산은 벼 12.5석, 순수익률은 당시 고려왕조가 거둔 조세율인데 25%다. 이로부터 구해진 1결의 가격은 7.8석으로 개선사가 지불한 7.14석과 사실상 일치한다.
이 관계를 확인하는 순간 나는 ‘유레카’를 외쳤다. 지난 연재에서 설명한 대로 신라는 귀족과 관료에게 토지로부터 조세를 수취할 권리를 지급했다. 그것이 그들이 소유한 토지재산의 실체였다. 개선사가 매입한 것은 그 수조권(收租權)과 다름없다. 바로 그 점이 석등기가 전하는 토지 면적과 가격 정보로부터 뚜렷이 입증되고 있다. 귀족과 관료가 토지재산을 처분하기 위해서는 왕의 허락을 구할 필요가 있었다. 그 점도 개선사가 토지를 매입하면서 정상의 절차를 밟았다고 한 석등기의 기술에서 확인되고 있다.
농업혁명
다른 한 가지 비밀은 삼국 통일 이후 8~9세기에 걸쳐 혁명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농업의 커다란 발전이 있었다는 점이다. 통일 전쟁은, 특히 당과의 전쟁은 참혹한 피해를 강요했다. 신라촌장적이 전하듯이 그 전쟁에서 남자의 30% 가까이가 희생됐다. 전쟁이 끝나자 신라는 일대 승평(昇平)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통일 대업을 성취한 문무대왕은 전쟁으로 죽은 사람을 추모하고 무기를 녹여 농구를 만들어 백성에 길이 살 터전을 마련해 주고 세금을 가볍게 하니, 집집이 넉넉하게 돼 곡식이 산 같이 쌓였다고 그의 유언에서 말했다. 그 일단의 광경을 석등기에서 살필 수 있다.
개선사가 매입한 물가 논 4결과 구석 논 10결은 석등기에 의하면 각각 5필지와 10필지로 이뤄졌다. 당시 1결의 면적은 1500평 정도였다. 이에 논 1필지의 평균 면적은 1400평이다. 반면 7세기 이전 삼국시대의 논은 단위 필지의 면적이 평균 30평에 불과했다. 관개는 구릉에서 흘러내리는 소량의 물을 이용한 자연관개 방식이었다. 그랬던 논농사가 8세기 이후 혁명적으로 변했다. 단위 필지가 47배나 넓어졌다. 그에 따라 관개도 다량의 물을 공급하는 인공관개로 변했다. 일대는 광주 무등산에서 발원한 개천이 동복호로 흘러드는 계간(溪澗) 농업지대이다. 곳곳에 개천의 물을 끌어들이는 보(洑)가 개설돼 천을 따라 펼쳐진 논을 적셨다. 석보평 또는 석보리의 ‘保’는 기록에 따라 ‘洑’로도 쓰였다. 돌로 개천을 막아 보를 열었기 때문에 지명을 석보라 한 것이다. 석등기는 보를 통한 수리 역사가 8~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이야기하고 있다.
쟁기의 보급
논농사만이 아니었다. 밭농사에서도 혁명적인 변화가 있었다. 쟁기의 보급이 그 원동력이었다. 삼국시대까지 쟁기의 보급은 제한적이었다. 쟁기가 출토된 유적의 수가 얼마 되지 않은 가운데 고구려의 영역에 한정되고 있다. 통일신라기에 이르면 쟁기 유적은 그 수가 일층 많아지고 그 분포도 전국적으로 광역화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쟁기의 보습에 볏이 달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대개 9세기부터다. 볏은 쟁기로 가는 흙을 한 방향으로 몰아 왕복 쟁기질로 높낮이가 뚜렷한 이랑과 고랑을 조성하는 역할을 한다. 이로써 콩·밀의 건조작물과 보리의 습윤작물이 같은 포장에서 재배될 수 있는 농사의 큰 진전을 보게 됐다.
앞서 소개한 대로 전쟁이 끝나자 문무대왕은 무기를 녹여 농구를 만들었다. 이로부터 쟁기가 대량으로 제작돼 널리 보급됐음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무기를 녹였다고 했으니 쟁기는 기본적으로 국가의 소유였다. 쟁기는 신라의 지방행정체제를 통해 농촌 구석구석으로 보급되고 관리됐다. 쟁기 유물이 대개 산성(山城)이나 현성(縣城)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는 사실로부터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신라 국왕은 전국의 토지만이 아니라 주요 철제 농구를 지배하고 통제했다. 그와 더불어 국왕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왕토주의가 점점 강화됐음이 8~9세기의 역사적 추세였다.
인구의 증가
정보가 빈약한 시대를 두고 지나치게 상상을 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렇지만 아무런 상상도 하지 않으면 알게 모르게 괴이한 환상이 널리 자리를 잡는다. 적절히 통제된 상상은 권장돼야 한다. 이전에 지적한 대로 3세기께 한반도 인구는 110만 명 내외였다. 그 정도의 인구를 상상해야 당시 한반도의 생태에 대한 상상이 추가로 발동되는 법이다. 이후 7세기까지 인구는 통일 전쟁에 따른 혼란과 피해로 증가할 수 없었다. 이후 인구에 관한 정보를 듣는 것은 중국 《송사(宋史)》로부터인데, 고려 인구가 210만 명이라 했다. 이로부터 역사가들은 몽골이 침입하기 이전인 12세기의 인구를 250만~30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전근대에서 인구는 좀처럼 증가하지 않는다. 총인구가 110만 명에서 300만 명으로 증가하기 위해서는 식료 공급에서 무언가 큰 진전이 필수적이다. 나는 그 시기가 8~9세기의 통일신라기가 아닐까 상상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1인당 조세량의 변화에서도 그렇게 추정할 수 있다.
47배나 증가한 조세
5회 연재에서 지적한 대로 7세기 초 고구려는 개별 세대로부터 벼 1두의 조세를 수취했다. 그런 기준으로 세대복합체와 취락에 조세를 부과한 것이다. 국가 수취의 중심은 초기 농경사회의 복합적 생태를 반영해 비단과 같은 공물에 두어져 있었다. 이후 조세의 수취 규식이 자세하게 전하는 것은 992년 고려시대 일이다. 그에 의하면 고려 농민은 1결의 논에 벼 47두의 조세를 부담했다. 당시 논 1결은 개별 세대가 보유한 경지에 해당했다. 다시 말해 7세기 초에서 10세기 말까지 개별 세대의 조세 부담은 무려 47배나 증가했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1인당 경지면적이, 곧 노동생산성이 그만큼 증가했기 때문이다. 조금 전에 소개한 대로 9세기 말 개선사가 구입한 논의 단위 필지는 1400평으로 삼국시대의 그것(30평)보다 47배나 컸다. 나는 출처가 상이한 수치 정보가 이렇게나 정확히 일치함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12세기까지 인구를 3배나 증식시킨 농업혁명은 아무래도 석등이 세워지기 전인 통일신라기의 일이었다.
석등기는 경문왕의 아내이자 진성여왕의 어머니를 문의황후(文懿皇后)라 칭하였다. 황후라는 존호! 거기엔 당(唐)을 이기고 농업혁명을 통해 승평의 시대를 연 신라의 드높은 자존심이 잔뜩 배어 있었다. 그 전쟁의 희생과 뒤이은 영광이 없었다면 후대의 한국사는 존속하지 않았을 터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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