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후관예우' 란 말이 나오는 이유

입력 2018-08-06 18:56  

신연수 지식사회부 기자 sys@hankyung.com


[ 신연수 기자 ] “차라리 인공지능(AI) 판사가 더 믿을 만한 것 같아요.”

대형 로펌 출신인 모 판사가 과거 변호사 시절에 소송을 대리했던 의뢰인의 별건 재판을 맡아 승소 판결을 내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각종 포털 사이트에는 부정적인 댓글이 무더기로 달렸다. 이 판사는 하나은행을 변호하며 900억원이 넘는 소송을 진두지휘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법조 경력 15년차 이상의 ‘전담 법관’으로 임용됐고 하나은행 사건의 재판장을 맡았다.

여론이 악화하자 법원은 해명에 나섰다. 대법원 관계자는 기자들에게 “변호사 경력을 가진 법관들이 정부 기관과 여러 기업을 대리하다가 임용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동일 사건도 아니고 당사자를 대리했었다는 이유만으로 문제 삼는다면 ‘법조 일원화’ 도입 취지가 훼손될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2013년 전면 도입된 법조 일원화는 일정 경력을 갖춘 변호사를 판사로 선발하는 제도다.

법원의 해명은 일견 설득력이 있다. 실력있는 변호사라면 정부와 대기업의 소송대리인으로 일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판사들에게 과거 의뢰인의 재판을 맡지 못하게 한다면 제대로 된 역량을 펼치기 어렵다. 경험 많은 변호사를 판사로 임명해 ‘고품질 재판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취지도 퇴색되기 쉽다.

하지만 법원은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국민의 불안을 해소하지 않고서는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없다. 공정하고 존경받는 법원으로 거듭나겠다며 도입한 법조 일원화가 오히려 판결 당사자의 불신을 초래한다면 안 하니만 못하다. 그렇지 않아도 법조계에서는 변호사 출신 판사가 예전에 몸담았던 로펌이나 대형 사건을 맡겼던 의뢰인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려준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후관예우’라는 말까지 나돌고 있다.

“재판은 실제로 공정해야 할 뿐 아니라 공정해 보여야 한다.” 판사들 사이에서 도는 금언이다. 판사들은 조금이라도 사적으로 연관된 사건은 다른 재판부에 넘긴다. 배우자가 대형 로펌 변호사면 해당 로펌이 들어간 사건은 일절 맡지 않을 정도다. 사법부의 권위와 신뢰는 바로 이런 ‘결벽증’에서부터 형성됐다는 걸 법원은 잊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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