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도 이념과잉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요지부동
혁신성장도 기득권층 반대 장벽 높아
1990년대 정보화에 앞설 수 있었던
그 열정과 결기는 어디 있나"
최병일 < 이화여대 교수·경제학 byc@ewha.ac.kr >
백자 달항아리의 은은한 아름다움을 재현했다는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에 둥지를 튼 식당과 카페들은 강북의 새로운 명소로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그곳의 식당 하나. 꽤 넓은 공간을 차지한 이 식당은 자리를 안내하는 사람도, 주문을 받는 사람도, 음식값을 계산하는 사람도 없다. 이쯤에서 당신은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그렇다. 이 모든 일은 식당 입구에 설치된 기계가 처리한다. 원하는 메뉴, 추가하고 싶은 재료, 원하는 맵기 정도까지 선택 단추를 몇 번 누르면 주문 끝. 원하는 자리에 앉으면 종업원이 주문한 식사를 가져다준다.
여기까진 요즘 자동화 추세인 식당인가 보다 했다. 그런데 이 식당, 일요일엔 문을 닫는다. 자동화로 인건비 압박을 상당히 줄였을 텐데, 기계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일자리마저 이념과잉 정책의 역작용에 위태롭다. 이 식당 옆에서 성업 중인 카페는 그날 내놓은 빵이 다 팔리면 문을 닫는다. 음료를 원하는 손님은 차고 넘치는데. 역시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의 여파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소득주도 성장의 핵심인 최저임금의 급속한 인상이 ‘예상된’ 파열음을 내고 있다. 경제는 두 바퀴로 가는 차인데, 고용주의 지급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여파는 한국 경제를 ‘고용절벽’으로 내몰고 있다. 올 상반기 폐업한 자영업자는 최근 10년간 가장 많다고 한다. 신한카드의 자영업 가맹점 200만 곳(한국의 전체 자영업자는 600만 명 규모로 추산된다) 중 무려 약 20만 곳이 올 상반기 폐업했다는 보도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의 16만 곳보다 더 늘어난 숫자다.
최저임금이 인상된다고 해도 그 노동자의 일터가 문을 닫으면 고용주, 노동자 모두 패자가 된다. 일자리를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던 정부는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하기보다는 과거 탓으로 책임을 전가하면서 제 갈 길을 가겠다고 고집한다. 이념과잉 정책의 궤도 수정을 주장하는 고용주들의 아우성은 기득권으로, 경제부처 요구는 철밥통의 저항, 즉 적폐로 치부된다. 기성권력에 대한 투쟁과 선명성을 브랜드로 내세워온 시민단체 출신 운동가들이 접수한 경제 정책의 궤도 수정은 쉽지 않아 보인다.
올초 경제학 공동학술대회의 화두는 ‘소득주도 성장, 가능한가’였다. 흰 눈 쌓인 강원 춘천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학자들은 “소득주도 성장은 재분배 정책이지 결코 성장 정책이 될 수 없다”며 “새로운 성장엔진을 모색해야 한국 경제가 살아난다”고 입을 모았다. 어떤 참석자는 “경제 정책은 원하는 것과 가능한 것을 구별해야 하는데, 지금 정부엔 그런 훈련을 받은 정책담당자들이 없는 듯하다”고까지 했다. 그 겨울을 지나 이젠 폭염마저 기억 속으로 저물어 가는데 문재인 정부는 경제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기보다는 이념에 현실을 끼워 맞추려고 한다.
문재인 정부가 내건 혁신성장 역시 본궤도에 오르기조차 쉽지 않아 보인다. ‘4차 산업혁명, 혁신성장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제 유력 일간지 하단을 점령한 광고의 제목이다. 택시노조, 민주택시노조 등이 연합한 이 광고 겸 성명서는 승차공유서비스를 자가용 자동차를 이용한 불법으로 규정하고 맹비난하고 있다.
자동차 한 대도 만들어 내지 않은 채, 택시 승객과 운전자를 연결해 주는 플랫폼 사업자인 우버의 시장 가치가 현대자동차를 앞지른다는 것이 4차 산업혁명이고, 혁신성장이다. 문제는 4차 산업혁명이 새로운 성장엔진이 될 수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일자리의 대부분은 로봇과 인공지능(AI)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점이다. 단순 반복적인 일일수록 대체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정설이다. 혁신성장은 인간과 기계와의 일자리 전쟁인 셈이다. 더 정확하게는 어떤 일들을 기계로 대체할까 말까를 다투는 인간끼리의 전쟁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승차공유서비스 반대 광고는 시작에 불과하다.
지금처럼 경직적인 노동시장 정책을 고집하는 한, 문재인 정부의 혁신성장은 600만 영세자영업자들을 더 심한 한파 속으로 내몰 것이다. 그리고 4차 산업혁명은 우리 곁을 그냥 지나쳐 버릴지도 모른다. 1990년대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열정과 결기로 선진국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의 ‘추월의 기억’은 이제 점점 가물가물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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