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저씨 말이지요? 아따 저 거시기, 한참 당년에 무엇이냐 그놈의 것, 사회주의라더냐, 막덕[1]이라더냐, 그걸 하다 징역 살고 나와서 폐병으로 시방 앓고 누웠는 우리 오촌 고모부 그 양반…… 머, 말두 마시오. 대체 사람이 어쩌면 글쎄 …… 내 원!”
고모를 내쫓은 사회주의자 고모부
일본인 가게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나’에게는 아저씨, 정확하게는 오촌 고모부가 한 명 있다. 이 아저씨는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고학력자이지만 사는 꼴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는 착한 아주머니(고모)를 소박 맞히고 신교육을 받은 여자와 살림을 차렸으며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5년을 감옥에서 보낸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아주머니네에 의탁했던 은혜를 입은 ‘나’는 명절 때면 고깃근을 사 보내는 등 아주머니를 돕는다. 고생하는 아주머니가 딱해 여러 차례 개가도 권하였으나 아주머니는 숭헌 소리 말라며 듣질 않는다. 폐병으로 육신이 무너진 아저씨가 감옥에서 나오자 아주머니는 식모살이에 삯바느질에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지극정성으로 그를 보살핀다. 물론 신교육을 받았다는 여자는 아저씨가 감옥에서 나올 때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아주머니의 병구완으로 아저씨는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돌보거나 아주머니를 편히 살게 해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계속 사회주의 운동을 하겠다고 한다. 도저히 못 끊으니 아편하고 꼭 같은 게 사회주의인가. ‘사람이란 것은 제가끔 분지복이 있어서 기수를 잘 타고나든지 부지런하면 부자가 되는 법이요, 복록을 못 타고나든지 게으른 놈은 가난하게 사는 법이요, 다아 이렇게 마련인데’ 공평해져야 한다며 ‘억지로 남의 것을 뺏어 먹자고 들다니’ 사회주의란 생 날불한당 놈의 짓이 아니고 무언가. ‘나’는 아저씨에게 정신 좀 차리라고 하지만 아저씨는 일본인 주인에게 잘 보여 일본인 여자에게 장가를 가겠다는 ‘나’를 딱하다고 말한다. 속 차릴 가망 없고 쓸모없는 저 아저씨를 어떡하면 좋을까.
판소리적 문체로 당대 그렸다
이 작품은 1938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단편이다. 관찰자인 ‘나’가 아저씨도 비난하고 사회주의도 비판하고 아주머니도 동정하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형식으로 막힘없이 술술 읽히는 것이 판소리 광대의 입담을 보는 듯하다. 판소리적 문체는 채만식의 장기이기도 한다. 이 술술 읽히는 이야기 속에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생애의 서사, 당대의 시대적 배경 그리고 이중의 풍자가 모두 들어 있다.
우선 ‘나’는 가정을 돌보지 않고 사회주의 운동으로 생활을 잃고 병을 얻은 아저씨를 비난하고 있다. 아주머니와 관련된 ‘나’의 주장은 극히 타당하다. 결혼을 했으되 아내를 돌보지 않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데다 자신을 위해 희생한 아내의 은공을 갚을 생각도 없으니 아저씨는 비난받아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외 ‘나’가 지껄이는 내용에는 아무래도 동조할 수 없다. 우선 ‘나’는 식민지 조선인으로서의 자의식이 전무하다. ‘나’는 일본이 좋다. ‘나’를 자별히 이뻐하는 일본인 다이쇼가 한 10년 뒤에 따로 장사를 시켜줄 것 같은 눈치인데 그러면 그것을 언덕 삼아 30년 동안 10만원을 모아 부자가 될 작정이다. 장가는 당연히 내지인 즉 일본인 규수에게 들 생각이다. 다이쇼가 얌전한 자리를 골라 중매까지 서 준다고 했다. 조선 여자는 거저 주어도 싫다. ‘구식 여자는 얌전은 해도 무식해서 내지인하고 교제하는 데 안 되고, 신식 여자는 식자나 들었다는 게 건방져서’ 못 쓴다. 아이들도 내지인 이름을 지어 내지인 학교에 보낼 참이다. 조선 학교는 너절해서 아이들 버려 놓기나 꼭 알맞다. 말도 조선말은 싹 걷어치우고 국어(일본어)만 쓰고 생활 법식부터도 내지인처럼 해야 돈도 내지인처럼 잘 모으게 된다. ‘나’의 이상인 부자의 길이 바로 내다뵈고 시방 열심히 그 길로 가고 있는데 그 미쳐살미 든 놈들이 세상 망쳐 버릴 사회주의를 하려 드는 데에 소름이 끼치지 않을 수 없다.
일그러진 인물을 풍자
이쯤 되면 ‘나’가 사회주의를 저주하는 것은 사상적 고려가 아니라 이미 가진 자의 감각으로 못 가진 자를 혐오하는 지극히 이해타산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요는 일본인 주인에게 잘 보여 일본인으로 동화되어 개인의 복락을 누리겠다는 식민지 소년인 ‘나’를, 몹시 천박한 이 소년의 얄팍한 출세주의를 독자들은 도무지 좋아할 수 없다. 시대와 아저씨에 대한 ‘나’의 비판 역시 그 피상성으로 인해 신뢰할 수 없다. ‘나’는 아저씨를 조롱하는 풍자의 주체이지만 독자들이 이 일본인 상점의 사환을 조롱할 때 ‘나’는 풍자의 대상이 된다. 즉, 이 소설은 풍자하는 주체와 풍자의 대상을 동시에 풍자하는 이중의 풍자성을 띠게 되는데 이는 아이러니를 발생시켜 이 짤막한 단편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문학적 장치로 작동한다.
‘나’의 끝없는 일본 문화 예찬 역시 그런 의미에서 이중 풍자의 대상이라 하겠다. 아저씨가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선택했지만 어딘가 철저하지 않고 따뜻하지도 않은 사람으로 그려진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는 사회주의에 대한 작가의 시각으로 읽히기도 하고 당대의 관념적 지식인들에 대한 비판으로 읽히기도 한다. 우리 속의 반민족자, 식민 지배가 낳은 청년 괴물을 지켜보는 마음이 쓰라리다.
손은주 < 서울사대부고 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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