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진정한 애국자

입력 2018-08-27 18:44  

고두현 논설위원


미국 보수진영의 대표 정치인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 별세하자 워싱턴DC에서 “진정한 애국자를 잃었다”는 탄식과 애도가 이어지고 있다. 정파와 상관없이 모두가 “조국에 헌신한 영웅”이라며 그를 기렸다. 대립각을 세웠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가장 깊은 존경을 표한다”고 했다.

한국에는 이렇게 존경받는 정치인이 없을까. 주말 동안 온라인 커뮤니티 여러 곳에 ‘미니 설문’을 돌렸더니 대부분 “독립운동가 외에는 없다”고 응답했다. 오히려 ‘맨손 창업 기업인’을 꼽는 사람이 많았다. “진정한 애국자는 일자리와 세수(稅收)를 창출하는 기업가가 아닌가.”

피터 드러커도 “한국 기적의 원동력은 불굴의 기업가 정신이고, 기업가 정신을 가장 잘 실천한 나라가 한국”이라고 말했다. 광복 즈음 우리 자본의 근대기업은 경성방직과 화신백화점 정도였다. 그러나 경성방직 김연수 회장과 화신백화점 박흥식 회장은 정부 수립 후 일제에 협력했다는 혐의로 투옥되고 말았다.

1945년 광복부터 6·25 막바지인 1953년 사이 서울 도매물가는 508배 폭등했다. 이런 상황에서 1953년 제일제당을 창업한 이병철 삼성 회장은 ‘사업보국(事業報國)’을 창업정신으로 삼았다. 물자 생산과 고용 창출, 납세로 국가에 도움이 되자는 것이었다. 1962년 제일제당은 총 조세수입의 4.61%를 담당했다.

이병철 회장은 6·25 때 ‘서울 사수’라는 정부 약속을 믿고 남았다가 고초를 당한 뒤 “자유민주주의와 국가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으며, 국가가 있고 나서야 사업도 있고 가정도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LG의 구인회 회장과 태창의 백낙승 회장 등 1세대 기업가들의 공통 이념도 ‘사업으로 국가에 보답한다’였다.

맨주먹으로 시작한 현대의 정주영, 롯데의 신격호 회장도 위기 때마다 신사업으로 보국했다. 대한석탄공사 창립을 주도한 강원탄광 창업자 정인욱 회장은 연탄을 대량생산해 전국에 보급했다. 그 덕에 산림녹화가 가능했다.

미국은 정치와 경제의 ‘두 바퀴 균형’으로 번영을 일궜다. 2차 세계대전 후 기업가들은 초당적 경제개발위원회를 구성해 경제 재건을 도왔다. 애플과 구글이 유럽에서 과세폭탄을 맞을 때는 정부와 의회가 앞장서 기업을 보호했다.

우리 현실은 어떤가. 대통령이 취임 직후부터 “기업인이 국가 경제에 헌신하는 진짜 애국자”라고 강조했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도 “일자리 많이 만드는 중소기업인이 애국자”라고 했다. 집권당 대표 역시 “기업인들이 정말 애국자이고 나라의 보배”라고 했다. 아직은 ‘말의 성찬’으로 들린다. 언제쯤 우리는 세계 10위권 경제를 일군 ‘기업인 애국자’보다 더 존경받는 ‘정치인 애국자’를 만날 수 있을까.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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