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백수 경력자 고미숙 평론가 겸 작가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백수만큼 세상에 좋은 것은 없다"고 격려(?)했다.
박사과정 중 스스로 백수되기를 선택하고 '짧은 불안 끝 긴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는 고미숙 작가. 고 작가는 30일 성북동 북카페에서 열린 신간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프런티어)'출간 기념 강연회를 열고 "이제 백수냐 정규직이냐 구분은 점점 무의미해지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요즘 예능프로그램을 한 번 보라. 다들 먹고 놀고 즐기고 여행 가느라 혈안이다. 방송국 스텝들은 모두 중노동에 새벽 촬영까지 피폐한 삶을 살겠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이 TV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모습은 이렇게 아름다운 쉼과 힐링이다. 이렇게 세상이 바뀌어 갈 거라면 우리도 인식의 프레임을 바꿔보면 어떨까. 노동과 휴식, 정규직과 백수, 좋은 직업과 돈 버는 것에 대한 굴레를 벗어버리고 여행도 가고 책도 보고 연애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 작가는 "우리는 대학을 졸업하고 인턴이라도 들어가기 위해 기를 쓰고 다음 목표는 안정적인 정규직이 되기 위해 또 죽도록 노동만 해야 한다"면서 "그러다 중간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어떻게 되나. 윤회사상에 따르면 그런 이들은 또 다시 원없이 노동을 하는 불가촉천민 (不可觸賤民)으로 태어날 수 밖에 없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고 작가는 지식노동하는 동안 청춘은 완전히 찌그러지고 정규직 편입된다해도 노동과 화폐가 우리의 정신을 살찌우는 데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고 작가는 취업난에 내몰린 청년들에게 제안하는 것은 '백수로 살기'.
'나머지, 쓸모없음, 버려짐'의 의미로서의 ‘백수’를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매니지먼트하는 프리랜서'로 보는 관점 전환을 제안하는 것이다.
취업난에 맞닥뜨린 청년들만이 백수는 아니다. 은퇴한 베이비부머 세대를 포함해서 중년 백수, 장년 백수도 수없이 많다. 어떤 청년들은 자신의 때만이 가장 힘든 것처럼 방황하기도 하지만, 중장년의 방황은 생각보다 큰 파고를 지녔다. ‘안정된 생활’을 구축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던 세대들도 삶의 허무함을 마주하며 결국엔 백수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모든 세대에서 백수가 양산된다면, 모든 인간의 종착지가 곧 백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고 작가가 백수의 롤모델로 제안한 사람은 적절한 무게감과 끝없는 위트를 지녔던 ‘조선 백수’ 연암 박지원이다.
호사스러운 삶을 누리기에 충분한 배경과 능력을 가졌음에도 청빈한 삶을 택했던 연암. 그에게는 어떤 다른 점이 있을까? 고미숙 작가는 기본적으로 남다른 자존감으로 무장했던 연암의 태도를 본 받으라 말한다. 돈이 없으면서도 호탕한 태도를 유지하며 제도 속 권력, 부의 유혹으로부터 스스로 해방될 줄 알았던 연암의 삶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우선 틀에 박힌 노동의 일과로부터 과감히 탈주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백수는 경제활동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조직할 수 있는 것’이다. ‘미니잡’을 예로들 수 있다. 짧은 기간 일하는 비정규직을 수차례 옮기며 자신의 리듬에 맞는 노동을 꾸릴 수 있다. 쉬고 싶을 때 쉬어도 되고, 운신의 폭이 넓으니 시간을 내 바이오리듬에 맞게 활용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규칙적이고 일관된 노동, 한마디로 ‘정규직’이란 진정한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다.
백수의 최고 자산은 친구라는 점도 잊어선 안된다. ‘혼밥’, ‘혼술’이 진정으로 위험한 이유는 바로 ‘유머’를 상실하게 하기 때문이다. 관계가 상실되면 동시에 유머가 상실된다. 혼자만의 생각에 갇히면 자의식이 팽배한다. 그러다 보면 한껏 확대된 자아와 비루한 현실 간의 경계에서 좌절을 마주하게 된다. ‘외로움’은 그 자체로 사람을 힘들게 하지만, 관계의 행복을 앗아간다는 점에서 더욱 위험하다.
연암은 출신 성분과 직업, 성별을 뛰어넘어 타국인들에게도 서슴없이 말을 건넸다. 많은 부를 획득한다고 인생이 행복해지지 않는다.
고 작가는 행복한 백수가 되려면 '관계'를 중시해야 한다고 무엇보다 강조한다.
자신의 생애 리듬을 알고 스스로 삶의 과제를 조정하며, 세상을 자유로이 탐구하고 규칙적인 노동에서 벗어난 경제활동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 화폐에 얽매인 삶을 살지 말고 관계가 바탕이 된 행복한 삶을 살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하지만 일평생을 백수로만 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생의 어느 한 순간이라도 백수가 됐을때 그 시기를 자신에게 보탬이 되는 시간으로 채워나가며 내 삶을 풍요롭게 가꿔나가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 것.
고 작가는 "돈을 안 번다고 집안에만 처박혀 있는 것은 최악"이라면서 "어제 몰랐던 것을 오늘 뭐 하나라도 깨우치면 그 하루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요즘 젊은 세대들 정규직 되려고 그 갖은 노력을 하지만 정작 직장에서 멘토를 만났다거나 직장에서 깊은 교감 나눴다는사람은 없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직장에서 왜 인생의 대부분을 '견디고 참으며' 보내야 하느냐"고 일갈했다.
이어 "정규직이든 취준생이든 퇴사했든 그날 하루를 내가 설계하고 나를 위한 활동을 하는 것으로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주위 친구들 중에도 잘 나가는 성공한 친구들이 많이 있지만 삶을 들여다보면 공허하고 돈에 집착하느라 진정한 행복은 잘 모른다. 100세 시대 남은 수십 년 인생을 그렇게 견딜 수는 없다. 하루에 1분이라도 나를 위한 시간을 갖고 진정 재미있는 것을 추구하며 살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날 출간회를 찾은 박영희(40) 씨는 "정규직이 아닌 프리랜서로 반백수 생활을 하다보니 가끔 비관적인 생각이 들 때도 있었는데 고 작가님의 강연을 들으니 중장년층들이 인생을 어떻게 ㅂ라봐야 할지 조금은 알 것 같다"고 소감을 전했다.
수년째 백수생활을 해왔다는 양희원(28) 씨는 "주변 친구들은 모두 하나 둘 취업을 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조급해지고 부모님들은 늘 걱정을 하신다. 실제 우울증을 겪기도 했는데 오늘 강연을 듣고나니 나처럼 살아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위안이 됐다. 특히 주변과 네트워크 형성을 맺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수많은 자기 계발서 들이 하나같이 경쟁력을 키워 남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노하우만을 전수하는 요즘.
행복한 백수 연암 박지원이 전하는 당당한 백수로서의 발자취를 되짚어보면 어떨까.
이미나 한경닷컴 기자 help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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