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미래에 대한 위기의식이 투자 늘렸다
美, 세계 투자의 37%…모든 업종에서 증가
설비투자 증감은 국가 산업 고령화의 척도
오춘호 선임기자·공학박사
올해 2분기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전분기 대비)이 0.6%를 기록했다. 1분기에 비해 0.4%포인트 낮아졌다. 기업의 엔진 역할을 하는 설비투자 증가율은 -5.7%로 2년3개월 만의 최저치였다. 과감한 설비투자는 한국 경제 성장의 디딤돌이자 발판이었다. 이 발판이 위축된다는 것은 한국 경제에 가장 큰 타격이다. 반면 미국과 일본은 설비투자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일본 주요 기업의 설비투자 증가율은 두 자릿수를 기록하고 있다. 산업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환경에서 새옷을 갈아입고 있다. 변화하는 설비투자, 어떻게 읽어야 하나.
나카니시 히로아키 일본 게이단렌 회장은 가전기업 히타치를 위기에서 건져낸 인물로 유명하다. 그가 지난 3일 일본 재무성이 발표한 2분기 기업 통계에서 설비투자가 많이 증가한 이유를 묻는 기자들에게 의외의 답변을 내놨다. 나카니시 회장은 기자들에게 “(기업의 투자 증가가)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지금 상황에선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들은 경기가 좋고 기업 실적이 개선됐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일손이 부족하고 4차 산업혁명이 진전되고 있어 기업들이 투자를 해야 할 상황”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만큼 일본 경영자들은 지금의 경제 상황을 절박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기업들이 미래에 대한 기대로 설비투자를 하는 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위기가 기업으로 하여금 투자하게끔 만들었다는 것이다.
지금 일본 기업들은 설비투자에 힘을 쏟고 있다. 재무성에 따르면 2분기 일본 기업의 설비투자액은 전년 동기 대비 12.8% 늘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11년 만에 이뤄지는 대규모 투자다. 특히 자본금 10억엔(약 100억원)이 넘는 기업의 투자가 활발하다. 자동차업계는 전기자동차 주행거리를 늘리기 위한 2차전지 개발에 전력을 쏟고 있다. 자율주행차 설비투자에도 주력한다. 차량용 반도체 생산에도 설비투자가 많이 필요하다. 반도체 기업 르네사스가 미국 통신용 반도체 설계업체 IDT 인수를 추진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읽힌다. 일본이 자랑하는 부품기업들은 인공지능(AI)이나 사물인터넷(IoT)에 맞는 부품 생산을 준비 중이다. AI 투자에서 실적을 내고 있는 기업도 많다.
日, 11년 만에 대규모 투자
기존 생산능력을 확대하고 제품을 개선하는 차원에서의 설비투자가 아니다. 나카니시 회장 말대로 일본 기업은 살아남기 위해 신규 플랫폼과 새로운 생태계를 찾아나서고 있다. 거기에 과감한 투자를 하고 있다. 일본 기업들은 수익이 나곤 있지만 10여 년 동안 산업구조 재편이 안 된 마당이어서 여전히 기존 산업에 안주하고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물론 미국 기업의 설비투자는 차원을 달리한다. 경기 호황에 걸맞게 기록적이다. 미국 금융회사 웰스파고에 따르면 미국의 민간투자는 세계의 37%에 이른다. 모든 업종에서 설비투자가 일어나고 있다. 특히 셰일혁명으로 인해 에너지 분야에선 2010년부터 8년째 투자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화학 플랜트가 계속 신설, 증설되고 있다. 한국 기업을 비롯해 해외의 유명 정유 기업과 화학 기업들이 플랜트를 세우려 미국을 찾고 있다.
美, 화학·IT가 투자 견인
무형자본 시대에 접어들면서 컴퓨터업계의 설비투자도 대단하다. 아마존의 2분기 설비투자만 100억달러가 넘는다. 아마존의 주요 수입원인 웹서비스를 뒷받침하는 인프라 투자다. 구글도 2분기 투자를 전년 동기 대비 2배나 늘렸다. 클라우드 시대와 맞물려 데이터센터는 갈수록 늘고 관련 설비도 증가한다. 온라인 매장 겸 창고도 확대하고 있다. 물론 이들 기업은 지속적인 신규 프로젝트에 투자하고 있다. 무형자산에 대한 자본 투자가 전통산업의 설비투자를 앞질렀다는 통계도 있다.
설비투자는 국가 경제의 가장 강력한 엔진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수요를 끌어올리고 공급도 확대한다. 기업들의 투자심리는 복잡하다. 수익성도 문제가 되고 미래 시장도 큰 요인이다. 제도나 정치 환경도 중요한 요소다. 일부에선 주가와도 연계를 짓는다. 주식 시가총액이 기업 투자치를 반영한다는 연구도 있다.
경영학자 마이클 포터에 따르면 설비투자는 산업 성장 초기엔 대규모로 이뤄지지만 성숙기에 접어들면 감소한다고 한다. 따라서 그 국가 산업의 고령화를 보려면 설비투자 증감을 읽으면 된다. 경기 예측을 하는 데 정확도가 가장 큰 지표라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설비투자 줄면 국가는 늙어간다
세계 제조업 시장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글로벌화에 따라 평평해진 지 오래다. 산업구조도 그에 맞춰 급속하게 바뀌고 있다. 기술의 단계별 발전 이론은 이미 낡은 관념이다. 단계를 뛰어넘는 ‘개구리식 도약(leap-frogging)’을 하는 국가가 많다. 중국은 컴퓨터와 인터넷을 거치지 않고 바로 모바일 시대를 맞고 있다. 투자 판단은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 기존 산업의 개선이나 확대 등은 의미가 별로 없다. 이들에게 미래의 불안과 불투명은 과거의 소산이다.
미래는 돌파하고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 이런 마당에 기업들은 각종 규제로 투자하기 힘든 국가를 과감히 벗어나 다른 나라로 옮겨간다.
韓, 기계·반도체 투자 감소 뚜렷
한국은 세계가 인정할 만큼 자본 설비투자로 성장한 대표 국가다. 50년 동안 8% 이상(웰스파고)의 높은 설비투자 증가율을 기록하며 성장해왔다. 2000년대 들어선 공장자동화와 로봇 도입률이 그 어느 나라보다 높은 국가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한국 경제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투자 위축을 겪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7월 산업활동 동향을 보면 설비투자는 전월보다 0.6% 줄어 3월(-7.6%) 이후 5개월 연속 감소세다. 1997년 연속 감소한 뒤 20년 만이다. 기계 투자가 줄어들었을뿐더러 경기를 떠받쳐온 반도체에서 투자 감소 징후가 뚜렷하다. 이승석 한국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이런 산업구조가 대외 충격에 노출될 경우 설비투자의 전반적인 증가세가 일시에 소멸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한다.
전기자동차나 자율주행, AI 등 4차 산업혁명 중심의 산업구조로 개편되는 과정에 발 빠르게 대응해야 한다. 정부의 정책 기조도 달라져야 한다. 법인세 세율을 높이고 투자세액공제 등은 축소하면서 복지성 지출 비중을 늘리는 정책은 바뀌어야 한다. 지금 설비투자가 약하다고 한탄만 할 게 아니다.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찾지 못한다면 기존 생태계가 붕괴할지도 모르는 절박한 시점이다.
ohch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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