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권력과 금리

입력 2018-09-09 17:53   수정 2018-09-10 10:56

허원순 논설위원


지금은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1997년 말 한국은행법이 개정되기 전까지는 금리를 정하는 금융통화위원회의 의장을 재무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맡았다. 한은이 ‘남대문 출장소’로 폄하되던 시절이었다. 경제의 최고 엘리트를 자부했던 한은으로서는 ‘치욕의 시기’였다. 그래서 외환위기 와중에 은행에 대한 감독·검사권이라는 막강한 ‘실권’까지 내놓고 확보한 게 금통위 운영권한이었다.

한은과 정부의 신경전은 그 뒤에도 끊이질 않았다. 정책협의가 있을 때면 장소 문제에서부터 티격태격하다 중간지점이라고 사당동에서 만나기도 했다. 과거처럼 노골적인 압박은 안 보인다지만, 경제부처나 청와대 정책실은 한은의 금리나 자금 운용에 민감한 편이다.

근래에는 정부나 국회 쪽이 주로 여론전으로 압박을 가한다. ‘척 하면 척’이란 말로 논란을 일으켰던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의 2014년 금리인하몰이가 그런 예다. 한은이 내릴 때 내리더라도 정부나 정치권 압력에 굴복한 것처럼 비치는 것에 예민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최근 미국에서도 이런 문제가 화제가 됐다. 일자리, 물가에서 호조세를 즐기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금리 인상이 달가울 리 없지만, 제롬 파월 중앙은행(Fed) 의장은 꿋꿋하게 자기 길을 가겠다는 자세다. 파월 의장은 올 하반기에도 금리를 두 차례 더 올려 ‘긴축금융’으로 간다는 입장이다. 트럼프 대통령 스스로 파월을 그 자리에 앉혔지만 금리인상에 대해서는 지켜볼 수밖에 없다. 기껏 언론 인터뷰나 트윗을 통해 “아주 기쁘지는 않다”는 식으로 압박하는 정도다. 기관별로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서로가 이를 존중하는 성숙한 미국 행정의 한 단면이다. 최근 외환위기를 맞으면서도 가뜩이나 강한 대통령의 권한에 금리결정권까지 추가한 터키와 비교된다. 정치 권력으로부터 금리가 얼마나 독립적인지도 선진국의 요건일 수 있다.

요즘 더불어민주당에서 금리인상론이 제기되는 게 예사롭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부동산 대책으로 나온다는 점이다. 금리에 대해 정치권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도 못마땅한데 부동산 정책의 실패를 저금리 탓으로 돌리는 분위기에 한은이 불편해한다는 소식이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오류는 시인 않고 통계청을 희생양 삼더니, 이제는 한은의 금리운용을 탓하겠다는 거냐”는 불만이 터질 판이다.

중앙은행의 정치적 중립, 금리정책의 자율성 문제를 두고 정치권만 탓할 수도 없다. 한은 스스로의 처신도 중요하다. 말끝마다 독립성을 외쳐온 한은이 왜 간부급 직원들을 청와대 비서실에 아직도 파견근무 보내는지에 대한 문제제기도 그런 차원이다.

huh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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