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어렸을 때 아빠가 밥통을 던졌잖아. 그치?"
얼마 전 일상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아이의 뜬금없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잉? 아빠가 밥통을? 그 무거운걸? 그런 적 없는데"
그런데 당시 상황을 재연해내는 아이의 설명이 제법 구체적이다.
"엄마 아빠가 크게 소리 질러서 무서웠어. 아빠가 문에 밥통을 던져서 그래서 엄마가 울었잖아. 그래서 나는 그날 무서워서 할머니랑 잤는데"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 '밥통 사건'을 떠올려보니 심리 스릴러 드라마 '보이스2' 못지 않게 소름이다.
때는 바야흐로 큰 딸이 두 돌도 되기 전. 뱃속에 있던 둘째 출산이 일주일 정도 남았던 때니 내 인생에서 몸도 마음도 가장 힘들었던 때였던 것 같다.
당시 남편은 게임에 흠뻑 취해 새벽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있었고 나는 아이 보는데 싸우기 싫다는 이유로 불만을 꾹꾹 눌러 참았다.
출산 준비와 큰 아이 케어 등으로 심신이 고달프고 스트레스도 많은데 남편은 허구한 날 게임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복장 터질 일.
그날 어떤 일로 남편과 다퉜는지 전혀 기억은 없지만 언쟁이 오가던 끝에 남편이 홧김에 근처에 있던 커피포트를 쳤고 그게 날아가면서 화장실 문에 부딪혔다.
나에게 던진 것은 아니었지만 내 앞에서 뭔가를 던졌다는 것만으로 서러움이 북받쳐서 감정도 격해져 싸움이 커지고 말았다.
그동안 아이가 보는 앞에서는 사소한 언쟁도 주의하려 했지만 그간 기울여온 노력은 이날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분노가 폭발하는 순간 눈에 보이는 게 없었는지 아이는 안중에도 없이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날 밤 아이 손을 잡고 울면서 위층 시댁으로 올라가 잤다.
'그때 아이 눈에는 커피포트가 거대한 밥통으로 느껴졌구나' 이제서야 깨달았다.
'아니 나도 전혀 기억 못 하는 그 예전 일을 얘가 어떻게 기억하고 있지?' 공포와 경악이라는 말외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사리판단 못하는 아기라고 생각했는데 뇌리에 그렇게 각인이 돼 있을 정도로 충격을 줬다니.', '얼마나 무서웠으면 그때 일이 아직도 잊히지 않은 걸까.'
세상 나쁜 부모가 된 기분에 쓰나미 같은 죄책감이 몰려왔다.
자아 개념이 확실히 자리 잡지 않은 아이들은 엄마 아빠의 싸움을 보면서 자신이 무엇인가 잘못했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자존감이 낮아지고 자신감이 없는 아이가 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부부가 결혼 후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늘 꽃길만 걸을 수는 없다.
대부분의 엄마들은 육아전쟁을 치르느라 몸도 마음도 지쳐있다. 이것저것 할 일을 많을 때 남편이 아이를 잘 돌봐주면 그나마 나은데 남편이 게임이나 혹은 TV에 빠져서 나만 바쁘고 힘든 것처럼 느껴지면 그 화(火)는 배가 된다.
아이가 옆에서 사소한 실수만 저질러도 "내가 조심하라고 했지!"라고 버럭 하지만 사실 그 화는 아이가 아닌 남편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다.
아이가 놀랄까 봐, 싸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평소 남편에 대한 불만을 꾹꾹 마음속에 눌렀던 게 '밥통 사건'의 시발점이었다.
그때 이후 둘째 출산과 더불어 다시 정신없는 육아전쟁은 시작됐고 내 코가 석자라 남편이 게임을 하는지 뭘 하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잃었던(?) 기억을 되찾은 그날 이후 아이는 무슨 일만 있으면 "아빠 그때 밥통 왜 던졌어?"라고 수시로 돌직구 질문을 날렸다.
유치원 공개수업이나 가족동반 모임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부부동반 모임에서 처음 만난 이들에게도 "우리 아빠가 밥통을 던졌어요"라고 해맑게 설명해서 나와 남편을 당혹스럽게 했다.
나와 남편은 5년 전 '밥통 사건'에 대해 아이에게 뒤늦은 사과를 전했다.
"○○야 미안해. 엄마 아빠가 그때 너 앞에서 싸우는 모습 보여서 많이 놀랐지? 네가 보는 앞에서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엄마가 동생 낳기 직전이라 힘들었나 봐. 아빠도 이런저런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만 실수한 거 같아. 엄마 아빠 다음부터 안 그럴게. 알았지? 용서해 줘."
아이는 뭔가 자신의 지적에 엄마 아빠가 태도를 낮추고 사과를 하는 모습이 낯설었는지 어깨를 으쓱하며 "응 알았어"라고 답한다.
남편도 때는 이때다 싶었는지 말을 보탰다. "그리고 제발 부탁인데 다른 사람들한테 '아빠가 밥통 던졌다'는 얘기는 이제 그만 좀 해주면 안 될까? 아빠도 고개 좀 들고 살자. 응?"
아이에게 쩔쩔매는 남편을 보니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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